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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의 역사이야기

겐로쿠 공원 ‘해석탑’은 백제7층 석탑


 
 
 
 
김문길 부산외국어대교수의 ‘일본속의 한국문화’
<2> 임란때 빼앗긴 우리 문화재
 
 
 
임진왜란 때 왜장들 가운데 가장 많은 병졸들을 데리고 침략한 진군은 가토우 기요마사(加藤淸正)이다. 그는 규슈(九州)지방에서도 유력한 대명(大名)으로 이름이 높았는가 하면 독실한 불교신자로 어릴 때부터 고승의 지도를 받아 조선불교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그의 회고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구보다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이 높았던 가토우 기요마사는 도요토미의 명을 받아 제2진으로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제 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병이 동래성을 쳐 함락시킬 무렵, 제2진 가토의 왜병은 육로로 문경새재, 박달재를 넘어 수도 한양에 도착하니 진격한지 불과 26일 만에 경북궁이 함락되고 선조임금은 할 수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경북궁을 함락시킨 왜장들은 경북궁내에 소장된 귀중품들을 살샅이 뒤져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때 경북궁내법당 앞에 세워져 있던 백제7층 석탑을 가토가 가져간 것이다. 높이 5m에 무게가 몇 톤이라 나가는 이 무거운 석탑을 당시 군수물품을 취급하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탐내어 가토로부터 선물로 받아 자기가 살던 가나자와(金澤)성에 세웠다.
 
가나자와 성은 그후 겐로쿠(兼六)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일본국립공원으로도 이름이 나서 일본의 3대 공원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공원을 찾는 이들은 오래된 노수명목과 해석탑(海石塔)이 유명하여 견학하러 온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가가지고 간 백제7층 석탑은 결국 마에 다에게 바쳐저서 오늘날에 와서는 해석탑(海石塔)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조선에서 가지고 갈 때는 7층석탑이었는데 겐로쿠 공원에 세울 때 아래 1,2층은 없어지고 지금은 5층으로 되어 있다. 가나자와(金澤)시 향토사학자는 해석탑의 경로에 대해 “메이지(明治)신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가나자와 성주인 마에다(前田)가 조선의 유일한 백제석탑을 입수해서 성내에 세워놓고 백제7층 석탑이란 안내판에 구체적으로 적었다고 전해지는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행정이 새로 개편될 때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의미로 해석탑이라 고친 것”이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빼앗긴 우리 국보급문화재는 이름마저 바뀌어 버린 형편이다. 그러면 왜장 가토는 왜 그 무거운 석탑을 가져갔고 마에다는 왜 자기가 살던 가나자와 성에 이 석탑을 세웠던 것 일까.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뛰어난 문화를 자랑했던 백제 초기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이시기 위해서 각 사찰에 목탑을 세웠으며, 백제중엽에는 이 목탑을 본뜬 석탑을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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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는 석탑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불상과 탑을 예배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지각색의 모형으로 석탑 제작이 범람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사찰은 물론이고 조그마한 암자에서도 석탑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보다 더 많은 사찰이 있으나 유명한 절에 가도 석탑을 찾아보는 것이 쉽지 않다. 일본사찰에는 석탑보다 목탑이 많다. 왜 일본사찰은 석탑이 보기 힘들고 목탑만 안치되어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은 석공술이 발달했지만 그 옛날에는 기술이 없어서 제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목탑기술도 백제 석공인 사공(寺工)이나 와박사(瓦博士)등이 건너가서 가르쳐준 덕으로 목탑이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다.
 
석탑은 원래 기법을 몰라서 만들지 못한 것이다.  경북궁 궁궐 내 법당 앞에 있던 백제7층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석탑연구자들에 의하면 석탑은 3,5,7,9,13층 등 홀수로 된 것 뿐이며 7층으로 된 것은 아주 희귀한 것이라고 한다.
 
백제7층 석탑은 우리나라에도 두서너개 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일본 가나자와 겐로쿠 공원의 백제7층석탑은 국보급 중에서도 국보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한 가치가 있으니 가토가 생명을 걸고 싸우는 전쟁 중에 석탑을 가지고 가 임진왜란을 총지휘한 참모 마에다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해석탑을 연구한 향토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조선인이 국태민안과 개인의 소원을 빌기 위해 사찰에 가서 탑돌이를 하고 기도했던 것처럼 마에다도 백제7층 석탑을 성내 그것도 거실 앞에 세워놓고 아침 저녁으로 온 가족이 탑돌이를 하면서 국태민안과 마에다의 가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한다. (계속)
 
김문길 부산외국어대교수 
[2009년 12월 23일 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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