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엄마 병실 입구에서 멈칫한다. 냄새 탓이다. 고약하다. 심한 날은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한다. 스스로 거동을 하지 못해 누워 지내는 할머니들만 계시는 병실이어서 기저귀를 가는 아침마다 병실은 냄새로 진동한다. 기저귀를 가는 순간도 자주 맞닥뜨린다.
일과에 쫓긴 나머지 그 시간밖에 엄마를 뵐 수 없어 억지로 고개 돌려 외면한 채병실로 들어선다. 요양보호사가 얼른 커튼으로 가려서 엄마 옆 병상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 채운다. 얇은 커튼을 뚫고 나온역한 냄새가 성능 남다르게 뛰어난 내 ‘개코’를 들쑤신다. 잠시 숨을 멈추고 냄새를 피하려 애써보지만 불가능하다.
코를 막고, 얼굴 찡그리며 싫은 내색 하기도 곤란하다. 엄마가 빤히쳐다보고 있어서다. 아들이 주는 간식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엄마. 이웃 할머니의 냄새엔 아랑곳없다. 아예 냄새를 인지 못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똑같은 처지의 당신이 이웃 할머니의 냄새에 어떻게 반응할까 싶기도하다.
누구보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해온 엄마 아니던가. 얼굴을 바짝 기울여서 할머니들의 기저귀를 갈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직업으로 하는 일이라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일까. 기어이 긴 날숨으로 기저귀 냄새를 날려 보내고 마는 아들이 부끄럽다.
오래 전 내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준 적이 있다. 노란 배설물을 깨끗이 훔쳐내고 하얀 새 기저귀를 채우기 직전 내가 치른 외설스런(?) 의식이 있었다. 아이의 사타구니에 코를 처박고 킁킁대는. 어찌나 단내가 나든지. 그럴 때마다 아내의 구박이 쏟아졌지만 그 변태는 그치지 않았다, 달콤해서.
사랑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것일까. 내리사랑만큼 치사랑은 힘든 걸까. 기저귀 냄새에서 지독한 엇박자 윤리를 경험한다. 중력법칙에 갇혀버린 사랑을 탈출시킬 방법은 없을까. 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치사랑도 점점 멀어져 간다.
그 중력의 법칙 뚫고 사랑 전하는 이들이 요양보호사들인듯. 좀 손길 거칠다고, 말투 불손하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시라. 어쨌든 그들은 우리 부모들에게 자식 대신에 사랑을 전하는 천사들 아닌가.
[2019년 7월 26일 제114호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