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 열 명 중 여덟은 ‘집안이 잘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단다. 지난해 보건사회연구원이 국민 3,873명을 대상으로 우리사회의 불공정성과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데 부유한 집안이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한 비율이 무려 80.8%로, 중요하지 않거나 보통이라고 생각한 비율(19.2%)보다 4배나 높았다. 우리사회가 여전히 빈부격차에 따라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다는 거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탓인지 이따금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어느 날 번쩍이는 호화 승용차를 타고 멋진 젊은 부부가 우리 집 낡은 사립문 앞에 등장한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는 부부는 다짜고짜 콧물 질질 흘리는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운다. “아이고 내 새끼!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 그동안 이런 누추한 집에서 얼마나 힘들었나. 이젠 더 이상 고생 안 해도된다.”
엄마아빠 말을 듣지 않아 혼날 때마다 집안 아재들이 나를 놀려댔다. “넌 이 집 아들 아닌기라. 다리 밑에서 버려져 울고 있는 니를 지금 너거 부모들이 불쌍타고 데려와서 키운 기라. 그 은덕 잊으모 짐승이데이!” 킬킬대는 그 농지기에 또 버러질까 두려웠고, 어린 맘에 부잣집 아들 꿈을 붙들고 있었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잘사는 부모를 둬야 성공할 수 있다’는 우리네 의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듯하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 들었던 지극히 평범한 얘기에 내 유년이 떠올랐고, 요즘 젊은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오버랩 됐다. 그날 선배는 와인 얘기를 꺼냈다. 포도의 생산과정에서부터 와인의 숙성에 이르기까지, 느릿한 선배의 말에 참석한 이들이 점점 취해갔다. 와인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라더니 정말 그랬다.
그날 선배의 여러 얘기 중 b몇 마디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포도나무는 척박한 토양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기 마련이다. 살아야 하니까. 깊게 내린 뿌리를 통해 포도나무는 땅 속의 수많은 미네랄성분들을 흡수하게 된다. 이처럼 척박한 땅에서 생산된 포도야말로 품질이 뛰어나서 결국 훌륭한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거다.
좋은 토양에서 자란 포도나무는 고생않고 낮게 뿌리를 내리는 탓에 그렇지 못하다,” 사회가 불공정하고 불평등 하다고 남 탓만 하고 있어선 안된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열정과 의지가 여전히 와인 같은 달콤한 인생으로 이끌어가는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2019년 6월 25일 제113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