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01일

임종수의 세상만사

태풍이 지나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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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저녁에서야 개울을 끼고 있는 길섶 풀들이 조금씩 정신을 수습하고 있다. 온몸에 뒤집어쓴 흙탕물이 마르면서 달라붙은 흙들을 털어낸다. 게으름 피우느라 미처 동료들과 길을 따라나서지 못했던 태풍의 잔존 세력들이 소슬바람으로 풀을 어루만진다. 강풍과 폭우, 뙤약볕에 지쳐 쓰러져 있던 물억새와 갈대가 기지개를 켠다.

태풍에 쓰러져서 온몸이 너덜해지고 구겨졌으나 꺾이지는 않아 부스스 일어서는 갈대와 물억새. 그 억센 생명력이 내 속에 감춰진 경외감을 불어낸다. 개울가의 나무들은 제 몸의 절반쯤 태풍의 제물로 선뜻 갖다 바쳤다. 꺾여서 축 늘어진 커다란 가지가 흉측스러웠고 처참했다.

문득 출근길 아파트단지 조경수들이 떠올랐다. 강한 바람이 여전히 아파트 처마 밑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 발치에 어린 솔가지와 벚나무 가지들이 뚝뚝 꺾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파란 하늘에서 내리쬐는 붉은 햇살 받은 어린 가지들이 여전히 피 범벅된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은 태풍의 호령 앞에 늙거나, 올 봄에 갓 태어난 어린 가지부터 희생을 강요했다. 먼저 태어나 키큰 녀석들이 어리고 여린 풀줄기나 잎들을 끌어안고 저항하는 개울가 길섶 억새나 갈대들과는 달랐다. 태풍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뒷얘기가 외려 더 무서웠다.

꺾이고, 쓰러지고, 무너지고, 깨지는 참상도 한갓 쓰레기더미로 죽은채 널브러져 있을 뿐 더 이상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는, 태풍이 몰아칠 때의 아찔한 상황은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웠다.

바닷가나 도심 고층 아파트 주민들은 태풍이 몰아치는 그시간,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듯 집이 몹시 흔들리는 바람에 유사시 대비해 아예 겉옷을 입은 채 밤새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단다.

탐욕을 조금 누그러뜨리지 않는 한 인간도 점점 거칠어지는 자연의 잇단 경고 앞에 공동체의 누군가를 그 제물로 내놓아야할지 모른다. 나무들처럼. 길섶 풀들처럼 위기 때 서로 꼭 껴안고 보듬어주는 사회가자꾸 그리워진다. 옛날엔 그랬던 것 같은데.


[202094일 제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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