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20일

레저/여행

정복의 역사속에서도 전통을 이어가는 인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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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땅. 남미. 유럽의 정복역사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많은 굴곡과 아픔을 담고 있는 곳. 아직도 문명에서 소외되고 그들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한 토착민들이 사는 곳. 이 땅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비단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비싼 비행기값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베링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었던 그옛날, 몽골리안들이 시베리아 ․ 알라스카 ․ 북미대륙을 거쳐 남미대륙까지 내려 왔다는 것이 고고학의 정설이다. 알라스카 쪽에 정착한 사람들은 에스키모가 되었고, 북미에 정착한 사람들은 인디언, 남미대륙까지 내려와 정착한 몽골리안은 인디오가 되었다. 인디오 어린아이의 엉덩이엔 어렸을 적 우리 엉덩이에 박혔던 퍼런 점, 그대로의 몽골 반점이 있다. 인디오와 우리는 한핏줄인 것이다.

페루의 쿠스코에 첫발을 디디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잉카제국의 한복판에 섰다는 감격에다 고산병(高山病) 증세까지 가세하기 때문이다. 남미의 척추로 불리는 안데스산맥속의 거대한 분지 쿠스코는 해발 3천7백40m에 위치해 있다. 평지에 살던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 온다. 가벼운 구토증세에 뒷머리도 아프다. 그래서 첫날은 약간의 환각작용이 있는 코카차를 마시며 무리하게 걷지 않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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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는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곳이다. 모자를 쓴 인디오가 판초를 입은채 밀랍인형처럼 꼼짝 않고 누런 흙벽 앞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고, 노새에 감자를 싣고 가는 할아버지 인디오가 풍경화 속의 주인공으로 박혀 있다. 처녀처럼 댕기를 땋고 짧은 통치마에 옥수수 자루를 등에 이고 느릿느릿걸어가는 인디오 여인의 모습은 마치영화 속 슬로모션 장면 같다. 쿠스코는 캐추아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태양의 제국 잉카의 수도로 지구의 배꼽이자 세상의 중심이었던 호시절은 지나고, 이젠 쓸쓸한 바람만 쿠스코의 골목을 스쳐 지날 뿐이다. 사학자들이 잉카제국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만 아직도 잉카는 미스터리 투성이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금, 은, 동의 정제술이 뛰어났었지만 철(鐵)은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에콰도르에서 칠레와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정복해 산지와 해안을 평행으로 달리는 2개의 간선도로와 수많은 지선도로망을 구축했지만, 정작 바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또 돌과 돌 사이에 면도날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정교한 석축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아치를 몰라 초가지붕을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마우타라는 지식인 집단이 제문(祭文)을 외우고 전승을 기억하고 사적을 암송했지만 문자가 없어 기껏 줄 매듭으로 가냘픈 기억을 잡아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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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석축술에도 초가지붕 스페인침략때 불타
지배와 억압속 꽃피운 예술성 골목마다 흥건


1533년 쿠스코는 스페인의 침략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현재의 쿠스코는 따지고 보면 참으로 우스운 모습이다. 뛰어난 석축술로 튼튼하고 정교한 벽을 쌓아올렸지만 지붕은 엉성한 초가로 덮은 탓에 스페인 침략 때 모두 불타버렸다.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정복자 스패니시들은 벽 위에스페인식 골기와를 올렸다. 지금 남아있는 쿠스코의 집들은 잉카제국의 인디오와 유럽에서 온 스패니시들의 합작품인 셈이다.

어둠살이 내리는 쿠스코의 뒷골목을 떠돌이 혼자서 터덜터덜 걷는다. 그때 스산한 바람을 타고 골목을 돌아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선율이 마음을 잡아 끌었다. 바로 귀에 익은 「엘 콘도르 파사」(철새는 날아가고)가 아닌가. 한 가닥 명주실처럼 이어지는 선율을 따라 골목길을 돌아돌아 찾아갔다. 반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본채를 돌자 쓰러질 것 같은 토담집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바로 인디오들의 동네 주막집「라촘바」(La Chomb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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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탁자와 널빤지 의자, 희미한 불빛과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인디오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한쪽 켠에선 맹인 셋이 전통 현악기를 뜯으며 조상들의 얼이 서린 가슴을 찢는 애잔한 노래를 캐추아어로 부르고 있다. 한 곡이 끝나자 같은 탁자에 마주 앉은 인디오 노부부가 떠돌이 여행객을 보고 빙긋이 웃더니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한다.

그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노부부가 마시는 것과 같은 뿌연 음료수를 1천cc짜리 생맥주 잔에다 담아와 내 앞에 놓는다. 노인은 내게 마시라는 시늉을 한다. 꼭 막걸리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한 모금 마셨더니 바로 막걸리 맛 그 자체였다.

단숨에 마시고 한 잔을 더 시키며 심부를 하는 아이를 따라갔더니 막걸리(?)를 담아놓은 독까지 우리와 똑 같았다. 땅을 파고 독을 파묻은 모습이며, 막거리 특유의 시큼한 냄새며, 거품이 약간 뜬 독 속의 막걸리며...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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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로 만든 쿠스코 막걸리 「치차」(Chi Cha)는 비단 쿠스코 뿐 만 아니라 옥수수가 나는 곳이면 어디서나 쉽게 맛 볼 수 있는 남미 인디오의 전통술이다. 인디오 노부부에게 닭고기 안주 하나를 시켜 드리고 치차를 세 잔이나 더 마시자 인디오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와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과 웃음을 날린다.

얼큰히 취해 주막집을 나서 골목길을 걸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들이 손에 잡힐 듯 총총한 밤이다. 지구 반대편 안데스 산맥 속 「세상의 배꼽」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비틀거리며 뽑아제끼는 「황성옛터」가 바람을 타고 한 발 앞서 골목을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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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4일 제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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