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0월 10일

독자칼럼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서있는가를 물어야 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이 올때가 많다. ‘내가 누구 인가?’라는 질문은 개인이 삶의 의미라는 질문을 새로이 던질 수밖에 없을 때 일어난다. 어렸을 때는 상상하곤 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지워져버린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문제를 직면해야 할 때도 그렇다.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이 다시 떠오르면, 그 책임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된다. 다시말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의 내 삶과 역할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결혼생활이 중년에 가서 파탄나는 경우가 많다. 그 가장 큰이유 중 하나는 결혼한 두 사람을 엮고 있는 구조물은 불안한 반면, 거기에 지나치게 큰 유년기의 희망을 얹어놓기 때문이다.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그럴 준비가 되었다는 사람은, 우리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사실 우리 마음 안에 있다. 어쩌면 살면서 스스로 책임질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삶은 무자비하다.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여로에서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요구사항이다. 이는 결국 타인의 중재 없이 자신의 의존성, 콤플렉스, 공포를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짊어져야 할몫을 타인 탓으로 돌리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안녕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지금의 나이가 됐다’라고 하는 자조적인 말을 듣곤 한다.

왜, 이 나이가 들어 삶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일까? 융학파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홀리스는 그 이유를 우리가 진정한 자신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누구의 아들과 딸, 누구의 엄마와 아빠, 어느 회사의구성원으로서 가족과 사회 안에서 사회화된다. 애석하게도 진정한 본성에 따르기보다는 삶은 이렇게 보아야 하고, 선택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키워진 결과로서의 삶에 가깝다.

‘내가 누구 인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로 확인된다. 내가 지금 어떠한 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그것만큼 나를 규명해주는 것은 없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는 제각기 다른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건반악기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매혹적인 선율을 만들어낸다. 제 각기 다른 악기들이 독특한 소리를 내지만, 음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극대화 한다. 악기마다 다른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내거나 따라가지 않고, 제 고유의 소리를 냄으로서 성공적인 화음이 가능하다.

자기의 소리를 분명하고 정확히 내는 것. 수많은 악기들 가운데 하나로서 자기의 위치와 음역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가장 절실하고 보편적인 물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질문이 마치 형이상학적인 명제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만큼 자기실존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자기를 아는 일이다. 바이올린 주자가 바이올린의 기능을 알지 못하면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를 안다는 것이 조화의 기본이다. 자기를 아는 일은 막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금맥을 캐든 혼신의 힘을 다하여, 깊숙이 캐 들어가야 자기를 만나게 되고 자기의 실체를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네’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말 한다. 눈에 들어 나는 ‘네’, 곧 육체가 아니라 이성과 판단의 세계다. 세계가 아무리 넓고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존재의 핵은 바로 ‘나’ 다. 개개의 ‘나’ 가 모여 집단의 우리를 형성한다. 하나하나의 ‘나’가 전체의 ‘나’ 곧 인류와 세계를 이룬다. ‘나’ 는 개체로써 하나일뿐 아니라 집단 속에서 역할을 달리하는 구성원이 된다.

작은 ‘나’ 는 가족, 직장, 사회, 국가의 일원으로 큰 나를 형성한다. 각각 하나의 ‘나’ 들인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 가정을. 선생과 학생이 학교를, 사장과 사원이 회사를, 국민이 국가를 형성한다. 나를 중심으로 나를 통해서 가정과 조직과 사회는 만들어지고 운용된다. 나에게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질 때 너와 나의 관계 바르게 세울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나아닌 너를 포용하고, 너와 협동하는 정신자세와 행동상태를 갖추게 된다. 이때 비로소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독선은 이해로 바뀐다.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고리처럼 연결지어져있다.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구슬인 개개인이 고리로 연결되어 질때 가치를 발휘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무엇보다 인생경영을 잘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김쌍주

[202087일 제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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