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2월 22일

임종수의 세상만사

디지털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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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여 년 전까지도 PC로 글을 쓸 때 종이엔 초고를 먼저적었다. 컴퓨터 화면을 보고 글을 써내려 가는 일이 아날로그형 인간에겐 낯설었고, 머릿속생각이 손끝으로 쉽게 전달되지도 않아서다. 문장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거나, 문맥이 완전히 뒤틀려서 다시 써야 하는 일이 허다해서 낙서하듯 볼펜으로 하얀 종이 위를 너저분하게 그어대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것보다 글쓰기가 수월했다.

많은 고쳐 쓰기에다 나 자신조차 해독하기 어려운 난필 탓에 글 옮기기가 쉽지 않아도 그게 편해서 꽤 오랫동안 이 버릇이 유지됐다. 컴퓨터 사용에 익숙해지면서 내 손에서 볼펜이 사라지고 있다. 하다못해 간단한 일정 메모조차 이전의 수첩 기재에서 손가락으로 톡톡, 스마트폰에 입력하고 있다.

 펜으로 쓸 일이 줄어들다보니 가뜩이나 엉망이던 필체는 거의 상형문자에 가깝게 바뀌었다. 쓰는 속도도 느려터진 데다 삐뚤빼뚤 글씨로 해독에 실패하는 일까지 벌어질 지경이다(하긴, 최근 30대 야당 대표가 방명록 글씨체를 인해 세가느이 비웃음거리로 전락되기도 했다). 게다가 볼펜을 손에 쥐는 순간 머릿속 생각의 실타래마저 뒤엉켜 문장에선 문법과 어법이 설 자리를 잃어 하얀 지면 위를 헤매고 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업무보고서를 작성한다. 내가 선택한 글자체에 맞춰 획일적인 글자들이 화면을 채워간다. 여기선 삐뚤빼뚤, 난필에 따른 해독 불가능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옛날 펜 글씨체에 담겼던 개인의 독창성과 발칙한 생각마저 화면 위 디지털 글씨체 처럼 획일화돼 가는 듯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2021628일 제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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