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5월 04일

임종수의 세상만사

언어의 이데올로기


임종수.jpg
 

“스님과 승려, 중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목사님이 함께 담소 나누던 스님께 물었다. 일순 당황스러웠다. 스님과 승려까지는 몰라도 ‘중’까지는…. 너무 앞서 나간 듯해서 난감해하는데 스님은 나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스님은 ‘스승님’의 준말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승려들이 진리를 밝혀주는 스승의 역할을 담당했대서 불린 겁니다, 승려는 일반적으로 불교의 성직자를 표현합니다만 영문 표기는 ‘Monk’를 쓰기 때문에 기독교의 목사나 가톨릭의 신부나 같은 의미겠지요, 저는 해외로 나갈 때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Monk’라고 적어 넣습니다,
‘중’은 무리 중(衆)을 쓰고 지금의 비속적인 표현과는 달리 예전엔 스님의 극존칭으로 사용됐어요.


스님의 설명이 고마웠다. 그간 인식의 오류도 깨우쳤다. 우리는 흔히 스님을 ‘중’이라 부르면 비하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해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는’ 승려를 ‘땡중’이라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중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가짜 중’을 ‘돌중’, 머리카락을 빡빡 깎은 머리를 ‘중머리’라고 놀렸던거다.


‘중’의 속뜻을 알고 나니 ‘태극기’의 지독한 오해가 가슴 답답하게 한다. 요즘 떠오르는 영화 ‘1987’장면 속의 민주화 투쟁을 하는 학생들이나 시민들의 손에서 태극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시절 우리에게 태극기는 가슴 서늘하게 하는 ‘지고지순한 가치의 상징’이었다.


함부로 구기기만 해도 천벌이라도 받을까 마음에서 두려움이 일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거치면서 태극기는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친구처럼. 그랬던 소중하고 친구 같았던 태극기는 최근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지독하고 고루한 쇼비니즘’의 화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 며칠 전 스님과 목사님의 대화에서 엿들은 ‘중’이라는 단어의 이데올로기가 ‘1987’의 태극기와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등장한 태극기의 이질적인 상징을 자꾸 덧씌우게 된다. 그뿐인가 평창동계울림픽에 북한선수단이 참가하고 단일팀이 거론되면서 일부에서 또 다시 태극기에 ‘폭력적인 쇼비니즘’ 상징을 옭아맨다. ‘한반도기’가 언제쯤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2018126일 제9619]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