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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수의 세상만사

떠나는 이의 해코지

임종수의 세상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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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일하면서부터 알게 된 사실 하나. 직원들의 퇴사가 지나치게 잦다는 것이다. 출근한지 채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떠나는 이도 있다. 홀연히 사라진다는 게 맞겠다. 사직서도 부모 손에 쥐어 보내는 이도 있고, 애인 편을 통해 전달하는 이도 있다. 다들 떠나는 이유가 없진 앓을 터. 잦은 퇴사를 줄여 볼세라, 오래 전부터 퇴직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왔다. 떠나는 이들의 불만사항을 통해 병원의 근무환경을 개선해보자는 취지였다.
 
관계단절을 전제로 받는 설문조사이므로 떠나는 이들의 ‘솔직함’과 ‘진정성’에 기대를 걸었다. 이직, 질병으로 인한 요양, 이사 등 항목별로 퇴직사유를 물어봤다.직장생활 중 근무 만족도, 동료끼리 소통 여부, 부서끼리 소통 여부, 의사결정 시스템에 참여 정도, 자기계발 기회 부여 등을 매우 만족,만족, 그저 그렇다, 불만족, 매우 불만족 등 다섯 단계로 답변을 유도했다. 구체적인 질문도 던졌다. 병원이 당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나, 맘 편히 상급자에게 불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였나, 하는 일에는 만족했나, 업무량이 부담스러웠나, 업무관련 교육은 충분히 받았나, 복리후생 제도는 만족스러웠나, 추후 다시 입사할 의향은 있느냐.
 
아무리 서로 간 소통을 강조해보지만, 재직 중일 땐 쉽지 않다. 행여 ‘모났다’고 찍힐까 걱정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런 걱정에서 벗어날수 있어 좀 더 솔직한 소통을 기대했다. 대개의 설문조사 결과는 의례적으로 되돌아왔다. 답변 곳곳에 떠나는 이의 ‘마지못함’이 묻어난다. 때론 짜증도 듬뿍 담겨있다. 외려 퇴직자 설문조사를 빌미로 직장 내 갈등을 살짝 부추겨놓고 떠나는 이들도 있다. 그간 서운했던 사람과 일에 대해 묵은 감정들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떠나는 이의 진정성에 기대어 구구절절한 사연을 몰래 구석구석 파헤쳐봤다. 사실관계는 그의 주장과 사뭇 다르다. 떠나는 이가 해코지를 한 셈이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떠나는 마당에 애먼 사람에게 퍼붓는 화풀이성 설문답변엔 괜히 맘까지 무거워진다. 말이나 글은 묘하다.
 
일단 밖으로 뱉어지면 좀 채 주워 담을 수 없다. 떠나는 이로부터 엉뚱한 화살을 맞은 남아 있는 이는 괜한 의구심 속에 살아가야 한다. 떠나는 이들이 던진 앙심은 내내 설문을 설계한 나까지 괴롭힌다. 그들이 남긴 앙심을 접하기 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맴도는 악담에 나도 괴롭고, 남아있는 이도 힘들다. 애당초 떠나는 이들에게 기대했던 솔직함과 진정성은 설문조사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이 떠난 이의 말 한마디와 메모 한 장에 발칵 뒤집혀있다.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 탓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왔다. 떠남으로써 그는 비로소 자유인이 됐고, 모든 이들로부터 ‘진정성’을 획득하게 되면서 ‘정의로움’을 부수적으로 얻어냈다.
 
그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가 남긴 말과 글 탓에 남아 있는 누군가는 모든 언로가 막혀 버렸다. 이제 국민들은 메모 속의 주인공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 다한들 믿지 않는다. 그 말과 글이 떠나는 이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던지는 정의의 선물인지, 억하심정에 내던진 앙심인지 진위여부를 떠나 이 봄 대한민국을 불신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어제 만주의 종찬이형이 또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작금의 ‘성 모씨 리스트’ 파문을 놓고 형은 고장 난 이성으로 인한 광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으로 긴 글을 마무리했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가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려니 나누며 살다 가자 /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한 짐이요 마음이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 중략...
 
누군가는 남아 있는 이들을 감싸고 위로해야 한다. 어차피 이 사회는 또다시 살아남은 이들과 함께 공유해야 하므로. 망인의 메모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갈등 또한 나의 설문조사처럼 괜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2015424일 제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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