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21일

임종수의 세상만사

봄의 전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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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역겨운 냄새가 내 속을 뒤집어놓는다.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교대역에서 구서동까지 시오리가 넘는 온천천 갈맷길을 걷고는 타박타박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데, 뭔가 색다른 향이 숨을 가로막았다.
 
한 시간 남짓 유산소운동의 뒤끝은 결코 아니었다. 숨쉬기를 방해한 건 구린내였다. 냄새의 진원지를 캐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이미 바닥에 쫙 깔린 어둠탓에 녀석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내긴 글렀다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녀석이 자꾸 내 꽁무니를 따라오는 듯했다. 발밑도 보고, 강렬함을 담은 두 눈을 길섶 쪽으로 던졌다. 아파트 조경을 위해 심어놓은 나무들 뿐이었다.
 
이튿날 출근길 막 아파트 단지를 내려서는데, 지난밤의 그 구린 향이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잠시 발길을 거두고 사위를 살폈다. 어느집에서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을 예쁜 애완동물의 더러운 배설물일지도 몰랐다. 길 위는 깨끗했다. 어젯밤 그 자리를 지날 즈음 향의 강도가 극에 달했다.
 
아무래도 나무쪽이 냄새의 진원지인 듯했다. 나무밑동 주변으로 거무스레한 뭔가가보였다. 가까이 다가갔다. 거름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나무의 생장을 돕기 위해 최근 거름을 뿌린 모양이다. 문득 향의 느낌이 달라지고, 역겨움은 반가움으로 돌변했다.
 
거름,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거나 땅을 기름지게 하려고 흙에 주는 영양 물질을 말한다. 대개 배설물이나 썩힌 식물 등의 천연 물질과 인공적으로 생산한 화학비료를 거름으로 쓴다. 어렸을 적부터 터잡은 내 기억창고에는 거름이 봄의 전령사로 새겨져있다.
 
너덜너덜한 검정 고무신에 구멍 난 양말, 얇은 무명옷으로 버티던 겨울의 혹독함은 어느 날 텃밭에서 날아드는 향기(?)에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겨우내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새싹들의 기지개를 도우려고 아버지가 똥지게로 진한 향을 품은 거름을 퍼서 날랐던 게다. 구린 그 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달콤한 향을 가득 머금은 봄꽃을 안내하곤 했다.
 
저기 저 아파트의 산수유도 곧 노란 꽃망울로 우리에게 향기로운 봄을 선사하려고 지금 역겹고 구린냄새로 자신을 휘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무거름을 바라보다 문득 류시화 시인의 시가 떠오른 상쾌한 주말 아침이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 돌아서고 나면 /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을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 주체할 수 없어 울적 할 때 /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 자신의 존재가 / 한낱 /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 그러나 / 그런 때일수록 / 나는 더욱 소망한다 /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 화사한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류시화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2015227일 제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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