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수의 세상만사>
“주소를 말씀해 보세요.” “사천 장전2동, 번지는 하도 자주 바뀌어서 모르겠네.” “자녀가 모두 몇 인가요? 맏이부터 순서대로 이름을 말해보세요.” “2남1여로 3남매를 뒀소. 큰애는 △△, 둘째는 ××, 막내는 딸인데 ○이라 하오.” “집 전화는 번호는요?” “팔, 오, 사에 ××××. 아니 그 정도도 모를까봐…. 나를 아주 바보로 여기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불쾌한 표정이 살짝 비친다.
치매가 걱정된다는 형의 말에 오늘 아침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치매검사를 받았다. 젊은 임상심리사의 질문들은 정신 말짱한 사람이듣기엔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들이었다. 치매검사를 위한교범대로 했을 게다.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는 상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임상심리사는 아들을 잠시 물리치고는 이삼십 분 더 어머니와 상담했다. “어머니의 기억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입니다.오늘부터 약물 치료를 하겠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아들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겨우 붙들었다.
여든셋 어머니는 이른 아침 첫차를 타고 혼자 부산에 오셨다. 문맹인데다 귀마저 밝지 못한 어머니에게 무리한 여정이라는 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음’으로 밀어붙인다. 바쁘니까. 이런 아들의 이기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음인지 어머니는 사상시외버스터미널까지 마중 나가겠다는 것마저 한사코 뿌리친다.
어머니의 길 안내는 아들 대신 그 아들의 명함이 수행한다. 택시기사에게 아들의 명함을 주고 길 재촉을 한단다. 보청기가 그리울 정도의 미약한 청력 탓에 택시기사를 통해 대신 전화를 걸게 해,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아들의 조바심을 어루만진다. 병원 앞에서 만난어머니가 손에 종이 가방을 꼭 쥐고 있다. 뭐냐는 아들의 말에 도라지라고 했다. 손가락보다 더 굵은, 튼실한 도라지들이 깨끗하고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네가 일전에 기관지가 좋지 않은데, 도라지를 먹으면 좋아진다 해서 밭에서 캐왔다. 꼭 집에 가져가거라.” 지난 추석때 왜 자주 콜록거리느냐는 어머니의 걱정에 아들은 그리 둘러댔다.
어머니는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자신의 치매검사를 위해 부산 오는길에 도라지 보따리를 들고 왔던게다. 어머니의 도라지 보따리를 본 아들은 며칠 전 인터넷을 달군 ‘치매할머니’ 사연이 떠올라 괜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부산경찰이 페이스북을 통해 전한 사연은 대충 이랬다.
남루한 행색의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한 시간째 거리를 헤맨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도움을 주려는 경찰에게 할머니는 “우리 딸이 애를 낳고 병원에 있다”고 할뿐 정작 자기 이름도, 딸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고, 하염없이 보따리만 부둥켜안고있었다. 슬리퍼 차림의 이 할머니가 인근 주민일 것이라 판단한 경찰은 할머니 사진을 찍어 동네에 수소문한 끝에 할머니를 아는 이웃을 찾았다.
경찰의 도움으로 딸이 입원한 병원을 찾은 할머니는 안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 다 식어버린 미역국과 나물반찬, 흰 밥을 누워있는 딸에게 내놓으면서 한마디 했단다. “어여 무라(어서 먹어라).” 오늘 아들에게 전한 어머니의 도라지보따리나, 치매 할머니의 보따리는 우리시대 ‘어머니들의 기억’ 보따리가 아닐까. 그 기억 보따리는 그 어떤 흉측한 치매라도 갉아먹진 못하리라.
[2014년 9월 23일 제56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