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요의(尿意)에 깼다가 다시 잠들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잊었다 싶으면 찾아오는 공황장애 대표증세. 억지로 잠들기를 포기하고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깜짝 놀라운 뉴스속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당국이 오늘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기로 돼 있던 남북 고위급회담을 갑자기 중지해버렸다는 거다. 줄곧 그 실체를 인정하고 묵인했던 한미군사 훈련 실시를 문제 삼았단다.그간 조마조마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막상 걱정하던 일들이 현실화되니 더 불안해졌다.
줄기차게 남북대화를 비난해왔던 세력들에겐 때 아닌 호재에 또 얼마나 국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갈등을 부추길까.북한당국과의 대화에는 상수(常數)는 존재하지 않고, 변수(變數)에 성공여부가 좌우돼 왔다. 그만큼 성사에 이르기까지 늘불안 불안하다는 거다. 남북정상끼리 종전 선언에 평화협정 체결 추진으로까지 치닫던 우호적인 대화 국면이 막바지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목전에 두고 북측에서 급제동을 건 셈이다.
지금부터 우리의 협상능력이 진짜 절실하다. 결론적으로 이 난관을 잘 이겨내리라 여기며, 전적으로 우리당국을 신뢰한다. 그동안 꽉 막혔던 남북관계를 풀어내는 현정부의 능력을 지켜봐왔으니. 남북 고위급회담 중지 소식에 몇년 전 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이 중앙언론에 기고한 칼럼이 떠오른다.
그는 개성병원을 8년간 운영하면서 많은 북한 관리들과 대화했다. 어떤 때는 출입문 개방문제를 놓고 당국자끼리 몇 달씩이나 질질 끌던 광경도 목격했다. 그런 그가 당시 꽉 막혀 있던 남북관계에서 서로 대화국면을 모색하자 나름의 ‘북한과의 대화 노하우’를 털어놨다. ‘대화는 반드시 진정성을 갖고 임해야 한다, 북측 인사들은 자존심이 강하므로 명분을 살려주는 일이 중요하다, 남측 인사들을 만나면 괜스레 위축되는 그들의 마음만 우리가 잘 헤아려 주어도 의외로 회담은 실타래가 풀리며 잘 진행될 수 있다.
서로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확고한 원칙이 전제 돼야 하고 그 원칙이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둬야 하는지는 여러 가지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어떤 이는 한반도 평화에, 어떤 이는 경제적인 실리에, 어떤 단체는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우위에 대화의 원칙을 둬야 한다고 한다.’ 그의 조언을 고려하자면, 궁극적으로 전쟁 위험 없는 한반도를 추구하는 우리는 이번 남북대화에서 평화에 최고 가치를 둬야 하는 거다.
지금 같은 대화국면에서는북한이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한미군사훈련’보다도 평화의 가치가 더욱 더 우선시돼야 한다는 거다. 한미군사훈련의 목적도 따지고 보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조치 아닌가. 북측도 판문점 선언에 담긴 의미를 다시 곱씹어볼 것을 권한다. 더이상 남측 사람들이 새벽에 잠을 설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2018년 5월 25일 제100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