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그 이름에서 도시는 일찌감치 바다의 이미지로 내게 덧씌워졌다. 그 속에 사는 동안 1년에 단 한번 바다를 보지 못해도, 나는 파도 넘실대는 바다를 끼고 사는 항구시민이어야했다. 이곳으로 억겁의 세월이 흘러들었을 강을 잊고 있었다.
낙동강은 말이 없었다.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들처럼 시끌벅적 달려드는 우리를 강은 조용히 보듬어줬다. 가슴 한 편, 이사람들아 이제야 날 찾아왔나?, 하는 잠깐의 서운함은 벌겋게 달아오른 노을에 파묻혀 낌새조차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낙동강은 마치 내해(內海)같았다. 아스라이 닿는 눈길에 넓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들었다. 물 위를 가르는 보트는 마치 넓은 얼음 호수 위를 지치는 썰매 같았다. 그 잔잔한 물결과는 달리, 배 위 사람들의 마음은 여느 바다의 파도보다 깊이 출렁댔다.
석양이 물들인 강물은 무척산과 금정산 단풍들을 물들였다. 강물을 제 얼굴에 끼얹어 미처 성장(盛裝) 끝내지 못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까르르, 찰칵! 인 생 을 소 풍 으 로 담 아 내 는 5060들. 팔짱 끼고, 또래 어깨에 기댄 채 숱하게 흐른 세월 속으로 순간 이동시킨다. 이 순간만은 오롯이 저만의 삶을 누릴 뿐이다. 이내 노을로 식어갈 해거름 햇살도 그들 얼굴 위에서 따스하게 내려 앉아 긴 하루 여정의 치열함을 내려놓는다.
낙동강은 삶의 서사요, 서사를 엮어가는 이들의 가슴 속 서정을 담고 흐른다. 그 강은 흘러 내려가지 않는다. 머물러 있다. 전쟁, 노동, 가난, 페놀, BOD, COD, 녹조라테 같은 혹독한 서사가 강물에 녹아서 가라앉아 있다.
아프고 가슴 답답하지만, 서사 한 꺼풀 벗겨내고 그 속을 들춰보면 삶의 안락함을 향한 우리 모두의 사무치고 애틋한 서정이 녹아 있다. 구포나루 뱃사람, 처녀 뱃사공, 학도병, 야반도주 농민들의 뼈아픈 서사가 낙동강에 씻긴 채 서정의 그리움으로 단장하고 있다.
부산엔 낙동강이 있다! 바다로 흘러들지 못한 아픈 서사를 끌어안고 그리움의 서정으로 모래톱을 쌓아가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며칠 전 낙동강 위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에 내 그리움 한줌 강물에 띄웠다.
[2019년 11월 25일 제118호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