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온천천 갈맷길은 뜨거웠다. 구름을 비집고 내리쬐는 햇볕이 약해진 늙은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지만, 후텁지근한 뒤끝의 칙칙함은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반소매 밖으로 드러난 살갗에 내린 햇볕이 몸속의 칙칙한 잡념을 말리고, 머릿속을 뽀송뽀송하게 한다.
낮은 담장 밖으로 삐죽 얼굴을 내민 감들이 햇볕을 받아 번질번질 녹색윤기가 자르르하다. 떫은맛을 잔뜩 품고 있는 타닌(tannin)세포들이 햇살 좋은 ‘가을’이라는 당밀로 달달해지고 있다.
풋감위에 노란 기운이 상강(霜降)의 서리처럼 내려앉는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모과도 흔들리는 바람의 틈을 타서 본격 해바라기에 나선다. 아직 강렬한 푸른빛이 한낮의 뜨거운 햇살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듯하다. 특유의 달콤한 모과 향이 따뜻한 햇볕과 함께 산책 나선 어르신들의 몸 위로 내리면서 고약한 노취(老臭)를 향수처럼 흩뿌려지는 듯하다.
푸른 활엽수 나뭇잎들도 양 팔 잔뜩 벌린 채 뜨거운 한낮의 햇볕으로 샤워를 즐기고 있다. 얼핏 젊음을 한껏 과시하려는 한때의 치기어린 만용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 또한 그들로서는 익어가는 한 과정이지 않을까.
아직 녹음 우거져 이파리 풍성한 벚나무 가지 위에 커다란 백로 한 마리가 볕을 쬐고 있다. 하얀 털 속에 숨겨져서 가늠하기 어려운 나이지만, 이내 울긋불긋 꽃단장 할 벚나무 단풍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겠지.
만물이 익어 가면 몸도 마음도 거꾸로 가기 마련 아닌가. 시간이 거꾸로 가는 벤자민 버튼처럼. 머릿속 뇌리는 서둘러 시퍼런 벚꽃 이파리 한 장 따서 기억 속 책갈피에 고이 갈무리하고 있다.
한낮 한 시간 남짓 온천천 갈맷길을 산책하는 사이 나도 익어가고 있었다.
[2022년 9월 23일 148호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