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칼빵(칼을 휘둘러 기습적으로 테러를 가하는 행위에 대한 비속어) 조심해!”
강남지하철 역 인근 화장실 묻지마 살인사건이후에 대학생 딸아이가 일 때문에 매일 밤 늦게 귀가하는 엄마를 걱정해서 던진 말이다.
요즘 흉흉한 사건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던 지라 밤길 조심하라고 정작 엄마가 해주고 싶었던 말인데 딸이 먼저 엄마의 귀가 길을 염려하는 세상이다.
서울 부산 대구 전국 각지에서 묻지마 살인사건에 대한 경각과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각성 등 사회안전망을 촉구하는 여성들의 외침이 일파만파 사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언젠가 나 자신이, 우리 가족이, 내 이웃이, 나의 동료가, 그런 끔찍한 사고의 당사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한 여성의 죽음 앞에 이토록 분노하고, 깨알같은 아픔을 촘촘이 나누고, 눈물로 얼룩진 포스트잇 물결이 가을바람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그 희생자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불안한 사회다. 치안하나만큼은 자랑하는 대한민국도 정신분열증 환자의 돌변행동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동안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관리문제에 대해서는 여러시행착오 끝에 인권운운해가며 현대판 주홍글씨니 뭐니 해도 신변고지를 통해 경계심을 갖도록 제도적 보완장치까지 마련하는 등 적극적 태세를 취하기도 했지만, 정신병력 소유자들에 대한 관리는 상대적으로 허술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자기 절제나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우 때로는 시한폭탄과 같은 중증 위험관리 대상도 있기에-물론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정상인보다 범죄 유발 또는 범죄의 환경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므로 체계적 관리가 필요하다.
이참에 정신병력을 가진 환자들에 대한 사후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꼼꼼히 점검하고 살펴봐야 한다.
단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는 범인의 진술에 무게중심을 두고 경찰은 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성급히 단정지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만 결론짓기엔 그동안 우리사회 여성 또는 사회적 약자들은 너무나 많은 폭력의 위험속에 노출되어왔고 피해를 입어왔다.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각성과 범죄자들이 사회적 약자를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에 대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된 지도 오래고 그에 따른 처벌도 훨씬 가중되어 법적으로 엄중히 다루어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고 여성은 각종 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최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발생 건 수는 2010년 1만8256건, 2011년 1만9498건 , 2012년 2만2004건, 2013년 2만8732건 등 매년 1천 500여 건이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 2014년 기준 10만 명 당 58.2명으로 10년 전(2005년)보다 2.5배나 증가한 수치다.
이뿐 아니다. 데이트폭력도 점차 잔혹해져가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경찰청 조사결과 지난 1개월간 전국 데이트폭력 집중신고기간 중 무려 1천279건의 피해가 접수된 가운데 868건이 입건되고 61건이 구속되었으며, 대부분이 폭행 상해(61.9%) 및 체포 감금 협박
(17.4%)이나 성폭력(5.4%), 살인미수(2건)로 나타났다.
사회는 지금 갑론을박 말이 많다. 단순한 살인사건을 두고 여성혐오다, 남성대 여성 성대결이다, 남성을 가해자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짓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경계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불거지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번 사건의 중요성은 단순 묻지마 범죄, 한 정신병자의 살인행위만은 아니다. 여성들의 분노가 결집하는 ‘현상’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도록 방치된 사회구조와 사회안전망에 대한 재점검차원에서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범행의 대상이 되기 쉬운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마련하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곁에 놓인 위험요소들을 꼼꼼이 점검하고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다시는 불행하게 희생당하는 우리의 이웃이 없도록 해야 한다.
[2016년 5월 25일 제76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