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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는 세상

무소유의 가르침

 
배 승 원 편집고문 
 
다도해의 바닷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 통영에 있는 미래사에서 였다.
 
 불쑥불쑥 치솟는 울분과 번뇌, 그리고 고독을 주체할 수 없었던 대학교 3학년을 마친 한 청년이 효봉스님을 찾았다. 스님과 마주 앉아 하룻밤 법문을 들은 그는 그 길로 부처님의 제자가되었다. 그 스님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나 영원히 부처님 품으로 갔다. 법정스님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리기와 무소유의 어려운 숙제 아닌 화두를 남기고 멀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무소유를 말하자면 효봉스님은 일제 때 고등고시 합격, 판사의 법복을 훌훌벗어버리고 부처님을 찾은 무소유의 상징직 인물이다.무소유를 주창하기 전의 스님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시절, 주변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로서는 함석헌 옹, 장준하선생 같은 분들이었다.
 
 그리고는 유신반대, 씨알의 소리에 관여하면서 파란만장했던 한국현대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스님은 인권과 민주화 운동을 겪으면서 마음에 증오심이 생기고 독을 품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래선 안 되겠구나. 수행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다짐고서는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간다.

 산중턱 부도만 덩그렇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고행에 들어간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책이 우리들에게 큰울림을 주는 <무소유>이다. 이곳까지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등지고 다시 한 번 떠난다.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어는 날, 스님 앞에 한 여인이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대에 이름 날리던 요리점 대원각 주인 길상화보살이었다. 서울의 금싸라기 땅 7천여 평의 대원각을 시주하겠다는 청이었다.스님은 길상사를 개산했고 <맑고 향기롭게>의 도량으로 정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메아리를 뜻한다.’ 고 했다.
 
 스님은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도 했다.

 서양의 누군가가 느림의 철학을 말하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내자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공감을 가진 적이 있다. 미국의 한 사람은 숲속에서 통나무집을 지어놓고 사는 것을 행복으로 친다는 그 사람을 찬탄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근 3-5년 동안 한 번도 손을 대지 않고 버려두고 있는 가재도구는 미련 없이 내다 버리자는 운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버린다는 것은 물질만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떠나서모든 성현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번뇌와 그리고 사랑과 미움의 갈등과 증오와 시기 등에서 벗어나는, 이른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가르친다.

 시인 강은교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뇌수술을 받은 스물일곱 때부터 독한 신경안정제와 두뇌 활성제와 피를 맑게 하는 보강제를 먹고, 해마다 뇌와 간검사를 하면서도 창작, 강의, 강연을 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횡단보도에서 넘어지면서 손목뼈가 부러졌고 또 선반에서 물건이 떨어져 발가락을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심각한 분노와 부정, 대상없는 원망으로 마음이 끓어올랐다. 집을 잘 못 옮겼기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그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사를 잘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빨리 가려고 서둘렀기 때문이다. 순간 긍정의 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독한 약도 한 가지만을 먹고 있다. 집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2010년 4월 1일 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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