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은 세끼가하라 싸움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고 대마도 번주 소 요시도시(宗義智)에게 명령하기를 조선국왕도 축하하도록 지시했다. 명령을 받은 대마도 번주는 몸 둘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전쟁 시 포로로 데리고 간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시 성정현왕비(成貞顯)묘를 도굴한 범인도 잡아 보내라는 독촉도 자주 있었는데 조선통신사를 보내 축하하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라 생각하고, 가신 야나카와 도시나가(柳川智永)와 의논 끝에 국서를 위조하기로 했다.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문서는 임진왜란 시포로인을 쇄환하는 의미로「회답겸쇄환사(回答 兼刷還使」로 명칭을 정하고, 위조문서를 만들고 직인도 위조했다. 직인「以政以德」으로 위조하여 조선에 보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에게는「조선통신사」이름으로 조선국왕의 문서를 위조해서 보냈다. 이는 양국의 국서를 모두 위조해서 보내고 사용한 것이다.
대마도 번주는 이렇게 위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할 형편이라 어쩔 수 없이 양쪽 모두 위조해서 사용했다. 조선을 따르자니 막부의 명령이라 하루아침에 목이 짤리고, 막부를 따르자니 또한 목숨이 위태롭고, 양국가 간에서 어려움이 많아 국서를 위조해서 통신사가 왕래했다.
조선에서는 포로로 간 사람들이 돌아오도록「회답겸쇄환사」로 보낸 것이고 일본막부는 축하하러 온 통신사를 맞이하였다. 임진왜란 후 국교가 단절되었으니 회복하자는 차원이고 일본에서 먼저 화해(사죄)하자는 의미로 ‘조선국왕봉서(奉書)’이라 하고 보냈다.
막부 도쿠카와 이에야스에게는 조선이 먼저 화해하자는 봉서(奉書)로 위조해서보냈다 . 봉서는 먼저 화해를 청하는 말이고, 봉복은 회답이란 것이다. 우리조정에는 봉복이라 하고 보냈다. 종이도 일본에는 없는 종이로 제작한 것이다.
국왕직인도「이정이덕」으로 위조해서 찍은 것이다. ‘이정이덕’ 은 당시 양국간에 사용한 국서 도장이다. 국서를 위조한 것을 몰랐던 조선 조정에는「회답겸쇄신사」라 알고 포로로 간 조선인들을 보내도록 회의 차 파견하였다. 일본막부는「조선통신사」축하객으로 맞이한 것이다.
1635년 도쿠카와 이에미츠(德川家光)부임 후 대마도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대에 와서 그의 가신 야나카와 시케오끼(柳川調興)간에 소동이 일어남에 야나카와 가신이 막부에 위조사건을 고발함에 사건이 탄로나고 막부는 두 사람을 징계하였다. 즉, 야나카와 사건은 일본역사에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조작된 문서와 위조된 도장이 지금 일본 후쿠오카박물관에 있다. 전시도 했다. 위조된 도장은 수년전에 경매에 나와 일본의 어느 박물관이 5억엔에 사들여 보관하고 있고, 사가현 박물관은 모조품(REPLICA)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명칭은 임진왜란 전에는 있었지만, 임란 후에는「회답겸쇄환사」의 명칭으로 간 것이 역사의 증거이다. 일본교과서에는 이런 사건을 알고「조선통신사」왕래는 막부 장군취임식에 축하객이고 조공을 드리기 위해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前) 나고야박물관 히로세 유이치(廣瀨雄一)선생은「조선통신사」는 위작된 명칭이라 했다. 원래 명칭은「회답겸쇄신사」이고,「조선국왕사」로 후(後) 세대에 남기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