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1893-1976)은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수립, 제 1대 중국 국가 주석으로 “핵심” 지위를 처음으로 부여 받았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1914-1991)은 무지하고 시기심이 강한 성품으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1966-1976)동안 인민대학살과 사회파괴주의 사상의 대표로 임명되어 극좌적 오류를 남긴 최악의 악녀라는 오명을 남겼다.
마오쩌둥의 혁명운동은 명확한 원칙이나 과학적인 진술을 갖지 아니하며 정세를 자기 형편에 유리하게 해석, 대중과 유괴된 모험적, 폭력적 전술을 주상하는 소(小)부루주아 혁명이라고 볼수 있다.
1949년 마오쩌둥의 21세 연하 장칭을 맞이하기 위해 부인과 이혼, 그녀의 문란한 과거에도 불문하고 그녀의 외모에 반해 4번째 아내 장칭과 결혼했다. 원래 장칭은 목수와 첩의 딸로 태어나 어릴 적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온 마음속 비통함과 분노와 함께 열등감에 사로잡힌 트라우마가 있었다.
어느 날 마오쩌둥은 장칭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그에게 접근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녀는 무식하고 천박한 여배우 출신이며 근본은 속일 수 없다고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마오쩌둥의 한마디가 곧 법이었던 시대, 그해 흉년이 들자 ‘참새는 쌀을 쪼아 먹는 해로운 새’라는 말에 중국전역에서 참새박멸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농작물 피해가 커 대 기근으로 수천 만 명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자 즉석에서 물러났다.
장칭으로 인한 불운의 주인공은 또 있다. 제 2대 중국 국가 주석 류사모치(1898-1969)의 아내왕광매이(1921-2006)는 부유한 집안의 출신으로 스텐포드대학외 다른 대학의 입학을 허가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장칭의 시기로 불운한 퍼스트 레이디로 일생을 마친 일화도 있다.
어느 날 마오쩌둥은 장칭을 옆에 두고 왕광매이(王光美)는 지적이며 다 갖춘 여인이라 칭찬을 하였는데 그때 장칭은 왕광매이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남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현재도 중국인들은 장칭의 질투심은 천하의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방의 첩, 여태후와 동등한 악녀로 인식한다. 여태후는 유방이 말년에 총애한 척 부인과 아들 여의를 질투해 유방이 사망하자 출세를 위해 여동생을 살해한 적이 있다. 유방의 사망후에는 유방의 부인인 척부인을 노예로 삼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고 두 눈을 멀게 한 뒤 돼지우리 속에 던져버렸고 아들 여의 또한 살해한 악녀 중의 악녀 여태후를 장칭과 같은 맥락으로 본다.
1963년 국외순방에 앞서 왕광매이가 장칭에게 의상에 대해 묻자 검정색 치파오 외엔 어떤 치장도 하지 마라 했으나 왕광매이는 흰색 치파오에 진주장식과 흰색 구두를 신고 나타나자 최고의 치파오 외교라 극찬을 받았다.
1966년 권자에서 물러난 장칭은 마오쩌둥에게 재기의 기회로 중국문화대혁명 사업을 건의, 마침내 마오쩌둥은 장칭에게 대표자로 임명하기에 이르렀고 그때부터 장칭의 광란의 질주가 시작됐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류를 남겼다. 그녀는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 10년간 무려 몇 만 명의 인민들을 무참히 살해 하였다.
그때 맨 먼저 장칭은 호위병을 시켜 왕광매이를 체포했는데, 죄명은 흰색 치파오는 자본주의 상징이고 그녀의 이름 王光美의 美는 미국을 상징하는 미국의 앞잡이라는 이유를 댔다. 이로인해 왕광매이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10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장칭은 감옥에 갔고 옥살이 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시기심을 학문적 명칭으로는 ‘키 큰 양귀비 증후군(Tall Poppy Syndrome)’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아이들이 키 큰 양귀비를 보면 막대기로 머리를 잘라 버리는 행동양식으로 걸출한 인물이나 잘 되어가는 형상에 대해 우선 반감이 생기는 마음을 빗댄 말로 “꿀이 화려하면 잡초들이 시샘한다.”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상대를 시기하여 생기는 시기심병(Envidia)에 걸리면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e)이라는 독소가 혈관에 쌓여 마음이 사악하게 되고 죽음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만약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 전에 사망했으면 장칭의 극좌적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고 역사에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 될뻔도 하지 않았을까.
이수인 자유기고가
[2018년 1월 26일 제96호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