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항해하는 데 있어 목적지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름이 고갈되는 순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무덤을 맞게 될 것이다. 인생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빈곤에서 허덕이던 저 지난1970년대 초 주경야독으로 낮에는 생산 일터에서, 밤에는 잠이 폭우처럼 쏟아지던 야학을 하며 공고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정상 코스가 아닌 한참 늦은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더구나 생활고의 궁여지책으로 자원입대하여 해병대를 전역한 네 해 뒤의 일이었다. 이러니 내 생의 전부가 지각인생일 수밖에 없었다. 가정환경은 늘 바닥이었고,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로서는 배우고자 하는 열의에 목말라 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자격증 시험에 도전을 했고, 그때마다 고진감래의 다디단 열매도 맛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어느덧 나도 중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 왔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남은 인생이 너무 시시하다는 느낌에서 허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경북 구미에 본부를 둔 독도의병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도관련 행사에 적극 참여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독도의 심각성을 남의 나라 일처럼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각오가 앞섰다. 50년이 넘도록 잔뼈가 굵었던 제2 고향이랄 수 있는 부산. 심심하면 영토분쟁을 일삼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 부산시민에게나마 독도의 심각성을 깨우쳐 줘야겠다는 취지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때의 결의가 오늘의 ‘독도해병지킴이’ 본부장인 나를 있게 했다. 오며가며 동네북 두드리듯 한 일본의 만행이 불거질 때마다 부산시청, 주(駐)부산일본국 총영사관 앞에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부산역 광장에서 1인 시위를 번번이 했다.
그러면서 원흉을 규탄하는 전단지를 뿌리기를 수차례. 뿐만 아니라 나름 강연 자료를 만들어 무소불위로 초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학교장의 승인 아래 무관심으로 넘길 수도 있는 세계적 보물 독도가 대한민국 자존심임을 목이 터져라 외쳐 댔다.
그러는 동안 언론의 관심 속에 많은 위안을 얻었고, 독도가 정말 우리의 영토임을 알리는데 큰 계기를 갖게 했다. 주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학생을 대상으로 독도 관련 웅변대회와 글짓기대회, 골든벨 퀴즈대회, 삼행시 짓기 운동 등등으로 유관단체의 각종 상위 상을 받는데 구심적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부산 서면 영광도서 4층 문화 사랑방에서 초빙강사 특강을 해오던 것을 지금은 부산양정청소년 수련관 7층 소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안위에 능통한 유명 인사를 모셔와 독도 특별강연을 11회째 열어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실 독도의 역사성에 대해 전문지식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게 되었고, 그런 회의가 있은 뒤 대한민국 초유의 한국복지 사이버대학에 독도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뛸 듯이 기뻐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던가? 7년전 독도의병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뜬 입학요강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독도NGO 포럼 사무처 윤미경 총무님은 자세히 입학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대학이란 문에 들게 되었다. 사실 지금껏 독도해병지킴이로서 동분서주하며 금전적 지출도 적지 않았다.
이런 형국에 작지만 대학등록과 함께 쓰이는 돈을 두고 집사람과의 마찰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파트 단지 관리실 전기업무에 더 열심히 일했고 지금껏 해오던 아내의 부업 일도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했다. 제일 문제는 낮 동안의 피곤을 떨치고 하루 두 시간씩 동영상 강의에 집중하며 스스로 관련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일흔을 눈앞에 둔 나로서는 머리의 회전속도가 굳을 대로 굳은지라 교재 한 페이지 읽어 내기도 너무 버거웠다. 차라리 곡괭이로 땅을 파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하나 그냥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인내하며 정진하는 것만이 내일의 광명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답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난극복이라 하지 않던가. 내 삶의 철학은 지향하는 것을 이루려면 그 분야에 미쳐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행해 온 독도지킴이로서의 행보를 두고 지각없는 일부 사람들은 미친 짓 그만해라고 폄하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귀신잡는 해병의 기질로 움켜쥔 두 주먹에 더 힘을 주었다.
더구나 죽어서 한줌 뼛가루를 독도에 묻겠다는 일념으로 13년 전 본적지를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이사부길 31번 (우) 40240로 옮겼다. 이제 남은 내 생애 최고 목표는 고군분투 끝에 한국복지 사이버대학 독도학과를 무사히 졸업하고 독도교육사 자격증을 취득 했으니 체계적이고 풍부한 지식을 겸비한 독도교육 전문강사로 강단에 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내 하나쯤이야 수수방관하는 무지의 국민에게 다가가 ‘가깝고도 먼독도 사랑’을 절실하게 심어주는 것이다. 나의 이런 사명의식 앞에는 어쩜 자신도 모를 신의 계시가 있었으리란 믿음을 갖는다.
[2019년 8월 23일 제115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