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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이쯔루항의 통곡소리

 

지난 8월 23일 부산여성단체협의회 임원단과 부산민족사관학교가 연합하여 일본 마이쯔루 앞바다를 찾았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알 수 없는 불귀의 혼이 되어 오가지 못하는 일본강제 징용자들의 한서린 울부짖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키마루호 희생자 추도행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머리위의 태양은 100년 전 그날처럼 여전히 강렬했고, 바다는 죽음보다 어두운 공포감으로 검푸른 물결을 일렁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8월 22일 한일강제합병이 조인되어 당월 29일 공포되면서 치욕의 강점기에 돌입하게 되었고 65년 전 8월 15일 광복이라는 광명의 날을 맞았다. 그리고 그해 8월 24일, 7천여 명이 탄 우키시마호가 폭침된 비운의 8월이다.
 
참으로 우연의 일치일까? 100년 전 8월 강제 합병조인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더니, 65년 전 8월엔 가혹한 노동에도 오로지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하는 기대만으로 견뎌온 노동자들을 배에 태워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은 천인공로 할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 일본의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실량부족으로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던 식민지 노동자들,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까지 합하면 선량한 피해자는 수백 만에 이른다.
 
뼈를 파고드는 추위를 참으며 석탄을 캐던 광부가 60만 명, 금속광산 15만 명, 부두노역자 30만 명,토목공사장 30만 명, 무기를 만드는 군수공장 5만 명, 군인 또는 군속으로 끌려간 사람이 37만 명, 종군위안부가 13만 명이 넘는다는 '재일조선 운동서'의 기록이다.
이들은 광복의 기쁨을 안고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와 고향땅을 찾을 수 있겠다는 설렘으로 귀향의 순간을 기다리며 우키시마호에 올랐다. 1945년 8월 22일 오전10시 일본정부가 강제 징용자들의 고향귀환을 위해 부산행 우키시마호를 출항시킨 것이다.
 
우키시마호는 4,730톤으로 정원이 3,700명이었다. 하지만 너도나도 앞다투어 고향을 찾겠다는 한국인들은 콩나물시루처럼 많은 인파가 승선했고,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7천명은 족히 이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시모끼타 반도를 출발해 동해를 거쳐 부산으로 도착할 예정이었던 배가 갑자기 부산의 반대쪽인 마이쯔루 앞바다로 들어간 시간은 24일 오후 5시. 그리고 20분후 폭파음과 함께 배가 침몰했다.
 
7천여 명의 영혼은 어찌 되었을까? 당시 일본 정부는 마이쯔루 앞바다에서 “미군이 설치해놓은 촉뢰로 인해 배가 침몰되었고, - 어찌할 수 없는불가항력이었다” 는 발표가 전부였다. 우키시마호의 속력으로 시속 22Km를 달린다면 부산항까지 70시간 약3일이 걸린다는 거리를 무난히 잘 항해하고 있던 중 갑자기 마이쯔루항으로 들어간 것은 그 괴략과 진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특히 마이쯔루는 일본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해군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그곳 앞바다에는 엄청난 기뢰가 설치되어있는 곳이다. 사고 후 5년간 태풍이 지나고 나면 당시 인양되지 않은 우키나마호 안에 잠겨있던 사체들이 마이쯔루 해변으로 밀려와 마이쯔루조선연합회가 일본정부에 건의하여 인양작업을 했다고 한다(1950년). 당시 사망자는 527명(일본인 25명제외)으로 되어있지만 그 숫자는 여전히 미지수다.
 
우리 여성단체일행은 우키시마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마이쯔루에서 76년째 살고 있다는 한 여인을 만났다. “본인은 한해도 그르지 않고 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일본여인의 표정속에는 38도를 넘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보다 더 강인한 애도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추도제를 마치고, 노란색 국화꽃 한송이를 잡고 잔잔하면서도 언제 그런 폭난이 있었냐는 듯 찬란히 빛나고 있는 마이쯔루 망망대해를 바다보며 아직도 부모형제와 고향산천을 그리며 통곡의 소리를 내고 있을 영혼들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오 ! 영혼들이여. 님의 영혼들이 민들레의 홀씨가 되어 대한민국 곳곳에 피어나고 있기에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 경제대국 10위 귄에 오를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8월10일 칸 나오토 총리가 강제병합 100주년을 기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죄”을 한다고는 하였지만, 이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사죄'로 끝나서는 안될 일이다. 일본정부는 반드시 진상을 규명하고 고통에 대한 치유와 배상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2010년 8월 31일 1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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