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오후2시 46분 경 JR전철안. 갑자기 휘청거리던 전차가 멈췄다. 순간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났다는 예감이 들었다. 전차는 멈췄고 승객들은 비상문을 열고 전차에서 질서있게 내렸다.
사람들은 전철역이 아닌 쇼우부 신주쿠선의 카메이도와 킨키쵸우 중간 어디에서 내려 하염없이 걸어갔다. 지진이 발생하면 지하철은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미 지하철 전 구간이 멈춰서 버린지라 사람들은 전철 입구 로비에서 안내 방송 문구에만 시선을 집중하며 이 모든 상황이 얼른 종료되기만을 기원했다.
그러나 뉴스를 보니 생각보다 심각했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지하어느 구간에 멈춰버린 전철 안에서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지상으로 탈출해 나왔다. 통신은 두절되고 가족의 안부와 자신의 상태를 알리기 위해 사람들마다 공중전화 앞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날 밤 도쿄시내도 숨을 멈춘 듯 모든게 정지되었다. 줄이어 달리던 차량도 멈추어 서서 헤드라이트 불빛만 길게 선을만들어냈고, 도시는 고요속에 침잠했다.
자연의 대 재앙이란 이런 것일까.
그 무시무시한 대재앙이 벌어진 이국 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가던 속에 내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2년여 간의 도쿄 파견 근무를 끝내고 부산으로 귀국한지 여러 날 후 현지에 남아있던 자녀의 개인적인 일을 보기위해 다시 찾았다가 대지진을 경험했다.
비상 대피소에서 틀어주는 TV화면을보니 쓰나미가 있었던 동북부 센다이 해안지역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물과불이 하나되어 건물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이 비춰졌다. 집채만한 높은 파도가 마을 전체를 휩쓸어버렸고 너울을 타듯 끝없이 몰려오는 급물살은 도시를 삼켜버렸다.
사람도 자동차도 집도 사라지고 없었다. 아비규환이라는 게 바로 저런 것일까 싶을만큼 공포스러웠다. 내가 있던 도쿄시내에서는 그 끔찍함을 실제 경험하지 못했지만, 지진의 여파는 여실했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끔찍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이 상상이상으로 심리적 불안감을 자극했다.
우리는 걷다걷다 지쳐 대피소로 공간을 내어준 도쿄돔호텔 로비에 들어가 간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로비에는 의자들을 잔뜩 깔아놨다. 신기하게도 어느 누구도 동요하거나 웅성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이 놀랄만한 상황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복도에서도 일렬로 가지런히 앉아 그들의 빛나는 질서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실시간 지진과 쓰나미 상황을 프린팅한 정보와 텔레비전의 속보에 예의주시하면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 쓰나미 피해지역은 처참했다.
인근 도시 여기저기에서도 지진의 여파로 집채만한 산의 돌이 도로 한 가운데까지 굴러와 길을 가로막았고, 건물옥상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바닥에 'HELP'라고 크게 써넣고 구조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떤 대피소에서는 담요 한 장도 없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아이를 끌어안고 비닐을 덮어쓴 모자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아직 겨울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봄이라 꽃샘추위가 심했고 식료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행히 대도시의 우리는 대피소 상황이 비교적 나았기에 별 추위를 몰랐다.
이틀 후인 13일 나리타공항을 통해 현지를 탈출해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 겪은 지진 트라우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곳을 빠져나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건만 아직도 멀쩡한 땅위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공포를 느끼고 있다.
하물며 쓰나미 현장과 인근에서 겪었을 생존자들의 공포는 어떠할까. 미묘한 한일 관계를 떠나 대재앙을 맞은 일본에 대한 격려와 위로는 필요해 보인다. 다행히 정이 많은 우리 민족들은 역사문제는 차치하고 인류애적 시각으로 큰 사랑을 실천했다.
많은 성금이 모였고, 한류의 주인공들도 앞다투어 위로와 성금을 쾌척했건만 안타깝게도 이 시점에서 일본은 문제의 역사왜곡 교과서를 내놓았다. 참 씁쓸한 일이다.
[2011년 4월 11일 18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