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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천 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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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번개를 동반한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세상이 온통 회백 빛으로 물들더니 급기야 천지가 캄캄한 밤이 되었다. 곧이어 바람이 시퍼렇게 날이선 칼날처럼 매섭게 몰아치며 세상을 뒤흔들더니 요란한 굉음과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창밖은 세찬 비바람과 천둥번개로 난리가 따로 없다. 가로수는 머리를 풀어 헤친 체 미친 듯이 사지를 꼬았다 풀었다 반복하며 흔들어댄다.
여기저기서 천둥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음질하는 사람과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마치 타락해가는 인간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공중에서 지상에서 광란의 연기를 펼치고 있다. 세찬 바람은 마치 귀곡 산장 놀이를 하듯 야릇한 소리를 내며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이런 날이면 나도 덩달아 가슴이두근거려 안절부절 폭풍우와 천둥번개와의 전쟁이 멈출 때까지 함께긴장해 있다. 이런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딸이 ‘엄마 무섭나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라며 겁에 질린 나를 놀렸다. ‘그래 엄마는천둥소리 비바람 소리가 무섭네.’하자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딸은‘엄마! 천둥에도 소리가 있나요?’하고 묻는다.
 
순간 이렇게 무서울 때는 오히려소리를 못 듣는 것이 마음은 편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천둥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아주 무서운소리라고 딸에게 말했다. “바람도 소리가 있나요? 비도 소리가 나요?” 곁에 바짝 다가앉은 딸에게 바람과 비의 소리를 전해 준다. 바람은
세기에 따라, 비는 내리는 굵기에 따라 각각의 소리가 다양하다고 하니 어떤 소리지 라며 더욱더 궁금해 하는 딸을 보니 가슴이 저리다.
 
딸은 사고로 양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를 가진 스물여섯된 직장인으로 주위에서 마음씨가 곱다며 지어준 천사라는 별명이 잘어울리는 아가씨다. 이름에 걸맞게 자기가 무슨 자선 사업가라도 되는것처럼 길을 가다가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좀체 지나치지 못한다.하루는 밤 열시쯤 문자가 왔다.“엄마, 아파트 앞에 트럭 아저씨가 손님도 없는데 혼자 감자 바구니 옆에 앉아있네. 가족들 기다리겠다. 한소쿠리 사갈게요.”
 
꼬마감자라 다음날 출근하는 딸에게 직원들과 나누어 먹으라며 감자를 삶아 보냈다. 엄마 직원들이 따뜻한 감자가 맛있데요 라며 행복한 모습의 이모티콘을 첨부하여 문자를 보내왔다. 가끔은 딸과 함께 가까운 포교원을 찾아 부처님과 조용한 묵언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러던 중 포교원에 신자가 없어 힘들다고 하자 천사는 고민 끝에이십 킬로그램짜리 쌀 한 포를 사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기로 하고 걱정을 내려놓았다. 딸은 주변을 둘러보면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세상 걱정을 자주한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도 삶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딸, 어떤 인연으로 부모자식의 연으로 만났는지 모르겠으나 분명 우리가족에게 많은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처음 딸의 귀에 문제가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세상의 소리와단절되어 살아가야할 딸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딸을 위한 생존방법을 터득해야하는 것이현실인 엄마였기에 정신을 차려야했다. 몸은 비록 장애가 있으나 정신만은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굳은각오를 하고 딸에게 한 발 한 발 세상과 소통하는 걸음마를 혹독하게연습시켰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말한마디 한마디를 수십 번 수백 번씩 반복에 반복을 해가며 적응 능력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어디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하여 이제 천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성실히 잘 하고 있다. 오륙십 년을 살아도 콩인지 팥인지 구별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딸은 세상의 이치를 너무 빨리 깨달은 것 같아 한편으로는 대견스럽다.
 
이제 12월이면 천사가 결혼을 한다. 세상의 달고 쓴 소리들을 귀로듣지는 못해도 마음으로 눈으로 온몸으로 느껴가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자랑스럽다.아마 결혼생활도 상대를 배려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는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확신해본다.작은 바람이 있다면 따뜻한 차한 잔을 앞에 두고 양철 지붕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아름다운 화음을 한 번이라도 함께 들어보고 싶다.
 
[2010년 6월 30일 제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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