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원북원부산운동은 10주년을 맞는다. 처음 운영위원장직을 수락할 때부터, 내 마음은 ‘운동’이 아닌 ‘책’에 있었다. 다시 책이다. 한 권의 책을 선정하여 독서운동을 펼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선정하는 과정이다.
나는 일주일에만 2백권 이상 쏟아지는 신간들을 검토하고 한 권의 책을 선정하는 과정 자체가 원북원부산운동의 핵심이라 여긴다. 긴 여정이었다. 작년 여름, 처음으로 원북원부산운동 도서선정위원회를 조직했다. 오랜 시간 치열한 토론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한 권의 책이 선정되길 원했다.
모든 결과는 과정이 치열하고 충실할 때 정당하다. 2012년 뜨거운 여름, 이미 2013년 원북원부산운동은 시작된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초·중등교사와 도서관 사서들이 매달 내 연구실에 모여 각자 선정한 책을 놓고 늦은 밤까지 토론을 벌였다.
선택은 곧 배제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며,그 책이 후보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누구 한 사람 허투루 책을 선택하지 않았다. 위원장을 맡은 나 역시, 매주 신간을 검토하고 지난 책 중에서 놓친 책이 없는지 꼼꼼하게 선별하여 후보 책을 내놓았다. 모두 자신이 선택한 책이 원북원부산운동의 후보 책으로 선정되길 원했지만, 다른 위원들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픔을 감수하고 탈락시키기도 했다.
지면을 빌어, 매달 좁은 내 연구실에 모여 아낌없이 자신의 열정을 내어준 위원들께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선정위원들은 공공도서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추천받은 책도 최종적으로 검토했다. 그리하여 후보도서로 100권의 목록이 완성되었고, 설을 며칠 앞두고 원북원부산운동 운영위원들과 실무위원들이 시민도서관에 모여 이틀간 논의 끝에 다섯 권을 시민 투표에 부치기로 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말 아까운 책들이 여럿 탈락했다. 100권에서 50권으로, 다시 30권에서 10권, 5권으로 압축하며 책을 선정하는 과정은 힘들었고, 개인적으로 선정되었으면 하는 책이 탈락하는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단계별로 엄선한 책 목록이 도서관과 학교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져 독자들이 책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든 책은 애초 독백이며, 독자를 만나 대화가 될 뿐이다.
따라서 독자가 다른 독자와 만나 대화한다면 그것도 독서다.”
요즘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좀처럼 책 읽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이제 책 읽는 국민이 선진 국민이란 공익광고 같은 주장조차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책은 읽히기를 갈망한다. 모든 책은 애초 독백이며, 독자를 만나 대화가 될 뿐이다. 따라서 독자가 다른 독자와 만나 대화한다면 그것도 독서다. 유럽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확산한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도 이러한 발상에서 출발했다. 도서관에서 사람을 대출하여 대화를 나눈다. 즉 사람이 책이다.
흔히 독서를 저자와 독자의 가상대화라고 한다. 그럼 같은 책을 읽고 다른 독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실제 대화이며, 일상의 독서라 할 수 있다. 인류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미디어이자, 여전히 영향력 있는 미디어가 책이다. 미디어란 ‘매개’를 뜻한다.책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때 가장책답다.
1998년 미국 시애틀에서 ‘만약 온 시애틀이 같은 책을 읽는다면’이라는 생각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은 소설책 한 권을 선정하고 모든 시민이 함께 읽도록 권장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독서 배지를 착용하였고 같은 책을 읽었다는 동질감에 지하철이나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책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아가, 그 책으로 토론회를 열고 학교 수업에 활용하면서 사람들은 독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경험을 공유하며 공동체 의식은 싹튼다. 한권의 책을 공유하며 시애틀 시민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된것이다.
독서는 저자의 집에 잠시 머물다,자신의 집을 만들어 떠나는 과정이다. 자신을 만나는 길, 나아가 세상과 만나는 길은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으며, 그 길 끝에 자신의 집을 짓는다. 자신을 만나는 길이 홀로 책 읽기라면, 세상과 만나는 길은 함께 책 읽기이다.
안 쓰는 근육이 퇴화하듯 책 읽지 않는 뇌도 퇴화한다. 단순히 길거리의 간판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읽기 능력은 아니다. ‘읽기 능력’은 언어의 숨은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고 추론하며 내용 전체를 이해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며, 이는 독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청소년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앞선 세대들이 일군 문명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 차원에 머물렀던 독서는 가정, 학교, 직장, 소모임 등을 통해 공동체의 독서활동과 독서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제 개인적 독서에서 함께하는 독서로 나아가야 한다. 원북원부산운동 운영위원회는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을 선정하려 노력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 선정된 5권 중, 올해는 ‘가족의 두얼굴’이 부산시민의 선택을 받았다. 이제 이 책으로 ‘함께하는 독서’를 했으면 한다. 그 경험이 즐거웠다면 한 권에서 멈추지말자. 5권 후보도서도 함께 읽자. 나아가 10권, 30권, 50권, 100권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한다.
원북원부산운동 운영위원회는 그 목록을 공개할 것이다. 일주일 한 번의 독서모임이면 50권 목록을, 한 달 한 번 모임이면 10권 목록을 추천한다. 일 년이 열두 달인데 왜 10권 목록인지 물을 수도 있겠다. 두 번은 책 없이 모임을 하기 바란다. 책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다 보면 깨닫게 된다. 사람이 곧 책이란 사실을.
[2013년 3월 28일 제40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