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태어남은 조물주의 사랑의 법칙에 의하여 이 땅에 나와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아주 오묘한 구별로 한평생을 살다가 죽어간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양성의 비율이 거의 반반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연 논리에 조금도 무리 없는 현실에 우린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절대적 계산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현실이라면, 이 땅은 다른 성(性)을 찾기 위한 엄청난 희생이 뒤따라 왔을 비극을 생각해 본다. 이런 가운데 요즈음 양성평등사회를 미션으로 우리사회는 각각의 목소리가 높고. 더욱이 근간에 발생된 묻지 마 폭행과 성폭력에 육체적으로 약한 여성의 큰 피해를 입다보니.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자들이 군림하는 사회로 남자들이 여성을 성(性)의 노리개로 비약하는 논리가 우리 사회를 부끄럽게 한다.
분명히 단언하지만 남자와 여성은 각각 고유의 개성과 자유를 향유하며 누구의 간섭과 차별없이 살아가야 한다. 이미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다스리라 했으니, 여기에 어떤 구별도 차별도 없이 동등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공정성과 자유는 서로가 도와가며 협조하는 삶 속에서 찾아지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우리사회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유교가 전파되면서 극치에 달해 심지어 여자는 식탁에서 식사까지도 못하는 수모 속에 남성의 콧대는 기고만장(氣高萬丈)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남, 녀 간의 대화가 자유로워지고, 여성교육의 문이 열리고 서양의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여성권리가 점차 인식되어 이 땅에도 남,녀 평등의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하여 양성평등 이름으로 새로운 사회에서 주목받는 화두가 되었다.
오랫동안 이어 온 가부장제 가족체계가 이젠 산업화 사회로 들어오면서 독립적인 생활로 가족의 형태가 전환되면서, 너무나 많은 변화가 도래하여 지금은 노후의 어르신들은 마누라의 횡포에 남자들이 설 땅이 없을 정도로 여성의 파워가 세졌다. 노동력의 부족으로 주부들이 일자리를 찾으면서 집안의 경제권을 주도하면서, 그동안 시달렸던 원한을 응수하듯 양성평등 사회는 여성 상위시대로 전환되는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면 너무 과장된 말이 되겠지만, 70대 80대 노인들의 대화 속에 차라리 일찍 가고 싶다말하니, 심각한 양성평등의 축이 기울어져 다시 생각할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요즈음은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넘쳐 공무원 시험이나 판검사, 교사 직군에 여성의 바율이 70%를 넘어가고, 심지어 초등학교는 90%가 여성교사라니, 일정한 성별 강제 할당이 필요한 직군이다. 그러나 아직도 상위직 특히 기업이나 정부부처에서 여성들의 파워는 아주 미미하여 여성들의 육아 가사 돌봄의 결과로 여기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이 상급자로서의 일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고차원적인 지식이 필요한 직무에는 오히려 여성들이 기피하는 상태에서는 양성평등은 아직 길이 먼 것이다. 위험하고 무겁고 더티(dirty)한 작업환경서도 과감히 도전하고, 이겨내는 정신이 이어진다면, 진정한 남녀 양성평등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요, 편견 없고 차별 없고 서로의 존엄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선진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다시금 양성평등에 대한 결론은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성별의 차이는 있지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며,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선도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나아가야 한다. 더한 바람은 학교 교육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양성의 특이한 구분 없이 지도되고, 각 가정에서도 딸을 선호하는 시대적 흐름에 너무 동조하는 바람으로 양성평등의 엇박자가 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다시금 하늘의 선한 귀한 선물이 인간의 작은 욕망으로 갈등의 소재가 되지 않도록 여성의 신체적 약함을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양성이란 두 단어는 아무런 논쟁거리 없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할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