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파릇한 잔디가 올라올 때, ‘아, 다시 푸른 잔디를 밟으며 공을 치는 시즌이 활짝 열렸구나!’하고 환호성을 지르던 때가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잔디는 누래지고 골프장 페어웨이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도 낙엽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어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럽다.
이렇듯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세월의 주름이 나이테처럼 우리 육신에 켜켜이 쌓이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물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약간의 충만함과 더 많은 슬픔과 아픔의 씨줄과 날줄로 삶이 채워지는 것과 같은 인생이라면, 골프라는 운동이 우리 인생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대개의 스포츠가 상대가 있고, 이기고 지는 승패의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골프는 이와는 사뭇 다른 게임이다. 먼저 골프는 남을 이기기 전에 나를 이기고 나에게 정직해야 하는 운동이다. 축구나 농구 같은 격렬한 운동은 심판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손으로 유니폼을 잡아당기거나 적당히 뒤에서 걷어차거나 심지어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는데 비해, 골프는 누구를 속이려고 맘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운동이다. 보기하고 파했다고 우겨도 된다. 남들이 잘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OB 말뚝 너머로 들어간 볼을 집어들고 와서 OB 아니라고 우겨도 된다. 그러나 재미있는 건 골프는 이리되면 스포츠로서 아예 성립이 안 되는 운동이다. 사기는 누군가를 속이는 것인데 골프는 그 속이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남몰래 며칠 동안 손바닥이 다 까지도록 연습을 하고 필드에 나갔는데 다행히 그 연습결과가 굿샷으로 나타나고 평소보다 좋은 스코어로 이어지면 그것보다 행복하고 뿌듯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했는데도 샷이 엉망이고 연습하지 않았을 때보다도 점수가 더 개판이면 그런 자신이 얼마나 밉고 ‘나는 안 되나 보다’ 자학을 하게 되는 슬프고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뭔가 열심히 해도 잘 안 풀리는 우리네 인생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연습을 했는데도 잘 안 되는 것은 그래도 언젠가는 연습효과가 나타나리라는 기대라도 있는 것이지만, 아예 연습조차 하지 않고 잘 치기를 바라는 것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수확을 바라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 없이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놀부의 심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아마추어 기준으로 30대, 40대 50대에 골프를 시작하면 그 시작하는 기점에 따라 골프 실력이 다르다는 설이 있다. 힘 있고 순발력이 살아있는 30대에 시작하는 것과 50, 60대에 골프채를 잡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 년 동안에도 봄이 있고 가을이 있듯이, 우리 인생도 청춘이 있고 노년이 있듯이, 골프 나이도 그렇게 서서히 때로는 갑자기 황혼이 찾아오게 돼있다. 드라이버 거리가 200미터도 못 날리게 되고, 집중력이 떨어져 자신도 믿기 어려운 미스샷을 남발하게 된다. 그래도 동반자들이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옛날과 다르네, 드라이버 거리가 왜그래...’ 농담삼아 던지는 친구들의 말이 아프게 다가오는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골프장도 출입을 못할 만큼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는 시기가 오고야 만다.
내년 봄을 기다리는 골퍼는 행복하다. 사업이 어려움에 빠졌지만 재기를 꿈꾸는 사업가는 견딜 수 있다. 가을이어서 그런가,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겨울이 코끝에 와 있어서 그런가, 불현듯 어느 재벌 회장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다시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의료진의 이야기에 절망으로 하루하루 병상을 지키고 있던 회장님이 갑자기 외출을 하겠다고 비서들을 불렀다. 이젠 병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인데 외출이라니...그러나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 수 있나. 담요로 전신을 둘둘 말고 앰뷸런스에 몸을 의지해 그가 찾아간 곳은 자신이 만들고 평생을 즐겼던 골프장. 나를 부축하라며 간신히 첫 번째 홀 티박스에서서 물끄러미 페어웨이를 바라보던 그는 한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병원으로 돌아가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기 골프장에서 평생 두 번 홀인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자기 회사의 전 제품을 직원들에게 선물로 주었고, 앞뒤 팀에서 플레이를 하던 사람들에게까지 호텔방이 꽉 차도록 선물을 안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명언도 남겼다. “골프와 자식은 내 맘대로 잘 안 되더라”
골프와 자식뿐이랴. 골프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그저 우주의 저하늘 너머로 한순간 섬광으로 태워지면서 내가 살던 푸른 별 지구와 작별하는 순간까지 내 삶이 귀하고 내 인연이 소중하고 내 생명이 존귀하다는 깨달음, 멋지게 날아가는 드라이버 샷의 포물선을 바라보며 환호하던 때와 다시는 이 골프장에 설 수 없다는 절망의 순간이 오버랩되는 것, 충만함과 쓸쓸함의 희비쌍곡선,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골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