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한 친구는 3년 전 남편을 떠나보낸 뒤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살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맞는 추석이나 설 명절은 쓸쓸하다. 1년 넘게 남편 병 구환 하느라 허리를 다쳐 생활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엄마가 자식에게 세세하게 말하지 않는 한, 자식은 엄마 사정이나 그 심정을 이해 할 수 없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미국 유명대학을 나온 큰 아들은 국립대학 교수, 둘째 아들은 이웃 도시의 꽤 잘나가는 개업 의사다.
이번 추석, 아버지 제사에 두 아들 모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큰아들은 부산까지 가면 시간이 늦다며 바로 서울처가로 갔다. 작은 아들은 형이 안 오니까 따라서 안 왔다고 한다. 친구는 자기가 오지 말라고 했다지만 서운하고 외로워 제사 상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키운 아들들인데...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지만 5일이나 되는 긴 연휴에 잠깐 제사 올리고 바로 처가에 가도 될 일이다. 젯상 앞에 홀로 외롭게 앉아 있을 늙은 엄마의 모습을 상상이나 해 보았을 런지.
시가에 오면 며느리들 일이 많아서일까. 제사 음식은 거의 다 장만해 놓았다고 한다. 엄마의 행복은 큰 것이 아닐 터. 자식 얼굴 손자 얼굴보고 식사 함께 하는 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친구는 이미 남편 사후 재산 상속을 두 아들에게 공평하게 마쳤다고 한다.
엄마에게 큰 덩어리로 상속 받을 것이 더 없어졌기 때문일까. 세상이 너무나 비정하게 변해 가고 있다.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의 이 시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흔히 부모에게 불효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 말이 먹혀들지 않는 것이 요즘 세태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고 자식 잘 되기만을 일심정심 다하여 뒷바라지한 부모를 자식들은 당연한 부모의 임무를 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가진 것이 크면 큰 데로 자기 몫을 따지고 수틀리면 부모를 외면하는 자식이 적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에서 미용실을 하는 딸이 추석에 친정 왔다가 어머니가 재산을 동생 앞으로 이미 상속 해 놓은데 격분, 집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이번 추석에 발생했다.
가족의 소중함은 일생동안 어떤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으뜸 되는 가치다. 가족의 가치가 무너진 사회는 아무리 풍성한 생활을 누린다 해도 기초가 모래위에 세워진 집이나 다르지 않다.
허술한 바탕위에 세워진 건물이 바람에, 태풍에, 홍수에 지진에 쉬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모두 경쟁 대상으로 삼아 ‘옹야 옹야’ 자녀를 귀하게만 키웠기에 우리 사회는 자신 이외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씨나 선의는 사라지고 있다.
알만한 어느 유명 재벌가의 상속싸움으로 아버지 기제사 때 형의 참석을 막으려고 대문을 일찍 폐쇄해버린 기막힌 사건이 국민의 냉소를 자아내게 한 적도 있었다. 부모 형제간의 우애를 헌신짝처럼 버린 천한 사고가 이처럼 거친 분위기로 귀결된 것이다.
이런 재벌가에 즐거운 명절분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본연의 진실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상층부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지겹다. 고유의 풍속이 사라질 때 사회는 삭막해 질 수밖에 없다.
상층부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지겹다. 고유의 풍속이 사라질 때 사회는 삭막해 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명절 풍속도 오늘에 맞게 다듬어 가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보듬어 주는 가족 관계는 황량한 사회를 치유하는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얼마나 며느리들이 고향에 오는 것을 꺼린다고 생각 했으면 전남 진도군 어느 마을 회관 앞길에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 주마”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을까.
양손에선물 보따리를 들고 가는 고향길이 있어 어머니 아버지가 행복하고 흐뭇했던 시절이 그립다. 올해도 어김없이 명절 전후 국제 공항은 인파로 붐볐다.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안이한 사고로 부모는 터부시하고 모두가 떠나는 요즘 세태,
명절 날 만이라도 부모의 노고를 위로하는 아들들, 시가와 친정을 함께 배려하는 며느리들의 넓은 마음이 어우러지면 정이 넘치는 풍요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갈수 있지 않을까.
[2016년 9월27일 제80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