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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시론

윤이상 음악이 주는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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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음악은 감동이었다. 10여년 전 4월 어느 날 저녁, 국제음악제가 열리는 통영으로 달려갔다. 세계 최고의 지휘자 주빈 메타와 바이올리니스트 장 영주가 함께 하는 비엔나 필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이지만 윤이상 곡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주빈 메타의 지휘로 윤이상 곡이 연주되기 시작 했을 땐 눈을 감아 버렸다. 서서히 악상이 고조되어 가는 순간 윤이상은 통영 앞바다의 파도처럼 감동으로 밀려왔다.


곡목은 잊었지만 가슴을 흔드는 진동이었다. 강렬한 그날의 이미지는 잊혀 지지 않았다. 지난 9월 9일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콘서트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듣고 서울로 갔다.


윤이상 곡을 경기 필이 연주한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완벽하게 단원을 이끌며 정열적으로 지휘하는 여성지휘자 성시연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날 윤이상은 또 한 번의 감동이었다. 덩어리 같은 검은 파도가 포말을 날리면서 기슭으로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환상에 젖었다. 가슴이 뭉클 해졌다. ‘우리 민족은 절대 망 할 수 없다’ 생각지도 못한 강한 신념이었다.


요즘의 나라 상황 때문이었을까. 음악이 주는 감동이 ‘긍정의 힘’으로 다가 선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때 TV생중계로 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의 연주 광경 이후 처음이었다. 윤이상은 통영이 낳은 현대 음악의 거장이다.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 음악기법과 결합하여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로 평가 받고 있다.


“내 음악은 내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내 민족의 뛰어난 예술적 전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백남준에게 자신의 음악이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노래 소리에 민감했다고 한다. 만주에서 큰 부자가 되어 돌아온 부유한 친척집잔치에서 들은 거문고 소리에 매력을 느꼈고 그 울림을 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잠들고 혼자 있을 때 어디선가 먼 산속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의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백부 집에 머물 때마다 들었다고 한다.


독일의 저명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쓴 ‘윤이상 상처받은 용’에서 린저는 어린 시절, 수난사, 음악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그의 생애를 담고 있다. 어머니가 윤이상을 가졌을 때 용꿈을 꾸었지만 그 용은 지리산 구름 속으로 맴돌면서 하늘까지 차고 오르지는 못했다.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꿈이 예언이었을까. 윤이상은 음악가로서는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동백림 사건으로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독일 정부는 전야제 오페라를 독일작곡가를 제치고 윤이상을 선택 했다.


바지와 잠방이 두루마기 등 우리 전통 의상을 그대로 재현한 오페라 ‘심청’은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작곡, 독일정부로부터 베를린 定都 750주년 기념 대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한 일본 학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동양의 유일한 천재 작곡가’라고 격찬했다 ‘나의 음악은 악을 멀리하고 삶의 승리를 노래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간절한 염원에도 그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예술은 정치와 이념국경을 초월 한다. 통영엔 이제야 윤이상 공원도 이름을 되찾았다. 아직도 왈가왈부 하지만 윤이상은 모든 권력, 기득권자를 넘어 영원하리라.


[2017922일 제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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