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부산일보에 게재된 칼럼 ‘죽음을 배우다’의 글들을 모아 ‘당당한 안녕- 죽음을 배우다’를 출간하였다. 마치 금방 태어난 아가를 안은 듯이 기쁘고, 이 책들을 지인들과 나누고 싶어졌다. 나누고 싶은분들을 내가 관련하는 기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니 수백 권이 필요했다.
친인척들, 그리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분들, 함께 시민운동을 하고, 나의 생일을 기억해주고, 나에게 종종 안부를 주시는 분과 안부를 묻는 제자들이니 ‘나누어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관계망을 설명할 때, 나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릴 수 있다. 제일 가까이는 직계가족, 방계가족이 있고, 그 다음에는 가장 친하다고 늘 생각하는(나의 죽음을 꼭 알려야 되는) 친구, 동료들이 있다.
그리고 더 바깥 원에는 가끔 소식을 주고 받지만 그래도 좋은 일, 굳은 일을 서로 알고 지내야지라는 신념이 서로 맞는 의지적 결속력을 가진동료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원에는, 가치나 신념과는 상관 없이 지역사회나 동네에서 함께 밥 먹고 함께 운동하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장 친한 분들이 존재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4번의 동심원을 그린 뒤, 위의 그런 조건에 맞는 분들을 한번 헤아려 보시면 좋겠다. ‘어찌 하오리까’라는 심정으로 상담실을 찾아오는 분들과 상담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모르는 나 같은 상담사를 만나기 전에 주위의 친밀한 분들과 몇 번의 진지한 이야기
를 나누었더라면 초기에 해결될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안타까움이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이름을 건이 긴 삶을 지탱해 나가다 보면 어려운 일들이 생긴다. 아무런 고통도 없는 인생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내가 화를 내어서, 내가 폭력을 사용해서, 그 사람이 나를 속여서, 신뢰가 서로 깨어져서 등등으로, 살다보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해결이 쉽지가 않을 때에는 내 몸과 마음이 아픈 상황이 생긴다.
그럴때 우리는 가장 먼저 친인척이나, 그래도 나를 이해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그래도 나에게 어떻게 하는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 가족, 친구, 동료 중에서. 그런 친밀한 분들이 바로 나를 살리는, 나를 지지(支持)하는 분들인 것이다.
그래서 상담과정에서 나는 그 내담자의 지지체계를 열심히 찾는다. 자신의 가까운 주위에 그런 지원군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고 계시는 분이 많다. 알게해 드리고 서로가 항상 ‘의존하는 존재’임을 다시 알려 드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다. 사회(집단)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이지만, 그 의미에는 나로 하여금 사회적 존재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고 있다. 내가 자빠지면 동료나 친구가 나를 부축하고, 친구나 동료가 자빠지면 나는 즉시 그들을 부축한다.
도덕적 존재인 우리는 가능한 서로 책임감 있게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때론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는 시간도 가지고, 그것이 바로 ‘어떤 형식이 있는 예(儀禮)’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파티, 모임이지 않겠는가?
단순히 밥을 함께 먹는, 운동을 함께 하는 관계도 좋고, 마음이 아플 때 내 옆에 좀있어 달라고 요청하는 관계도 좋다. 내 스스로 필요한 사람이 될려고 노력하면 나의 인간관계망은 두터워지고 넓어지지 않겠는가?
[2017년 10월 27일 제93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