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를 지나면서 이 세상의 평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세 가지 차별이 인종 차별, 성 차별, 그리고 계급 차별임을 알게 되었고, 그런 차별인식에 민감하여야 함도 터득하였다.
그러나 1990년 초부터 일기 시작한 여성주의(페미니즘) 운동, 소위 성평등(생물학적 다름, 즉 성별이라는 게 어떤 행동과 태도, 인식을 설명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가치)을 실천하려는 노력들은 먼저 우리 사회의 성차별 행태들을 고발하고 그 형성과정(소위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과정)을 고찰해 보려는 태도들을 촉발시켰다.
물론 이런 자각은 일상의 성차별에 분노를 느끼던 많은 여성들에 의해 들추어지고 고발되면서 우리 사회에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은 ‘성평등적’이어야한다는 의식을 교양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할 말과 안할 말은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1900년대를 거쳐 오면서 나타난 많은 변화의 불균형 중 두드러진 것을 찾으려고 한다면 아마 여성과 남성의 성평등 인식 차이일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화성 남자, 금성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고, 그 인식차이는 세대를 거치면서 많이 감소될 것으로 기대될 뿐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여성적 기울기’에서 ‘성평등적 기울기’로 넘어온 만큼 남성들은 ‘남성적 기울기’에서 ‘성평등적 기울기’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오랜 세월 유전행태적으로 각인된 남성우월적 사고와 행동에서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는뜻이다.
그래서 그 불균형이 부부관계나 부모자녀사이에서 파편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우리는 어느 성별인가에 관계없이 불행하고 편안하지가 않다. 친구 A의 남편이나 아침 운동에서 만나는 B여사의 하소연은 한결같이 ‘남자들은 왜 그래? 혹은 행복하게 살줄을 모르는 인종들이다’라는 정도로 결말 맺고 있다.
최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탁현민 행정관이 동료들과 함께 쓴 책에 게재된 글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 글들을 읽어 본 나의 소감은 일상에서 내내 들을 수 있는, 소위남자들의 말들과 한푼 어치도 다르지 않았고, 여성인권운동 현장에서 활동가들로부터 받은 보고서 내용에 실린 남성들의 언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딱 대한민국 남성 의식의 평균선에 서 있는 아주 보통의 남자였다. 일상에서 늘 듣는 그 남자들의 그 작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번에는 분노해야 한다고 여겼다.
소위 문재인 대통령께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나는 그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불평등성을 이해하고 계신다고 기대하였고 그가 역시 주장하고자하는 그 평등의식, 그 가치가 그의 정책, 그의 인사, 그의 정치속에서 녹혀져 나오기 기다렸다.
모 야당대표 같은 남자도 소위 한국의 정치리더로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탁씨 정도가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선거 때 우리에게 던진 그 찬란한 구호 ‘저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는 말은 이제는 한국사회의 불평등 조각들을 걷어 내어야하는 방향타가 된 것이다.
물론 탁씨의 표현은 평균적이다. 그만 저급한 사람이 아님도 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부의 방향타에 올라타 있기에는 적절한 사람이 아니다. 이 참에 그를 통해 대한민국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저급한 인식들의 표출 - 임신한 여교사, 예뻐야만 하는 여직원, 성매매 찬양 -이 얼마나 불평등적인지를 좀 알게 해 주면 좋겠다.
인간의다양한 성적 욕망의 의지나 표출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이란 주제에 공감할 수 있지만, 일상의 사회적 관계에서 그런 남자를 동료로, 지도자로, 심지어 가족으로 만나는 것에는 저항하고 싶다.
아침 신문에, 앞으로 인구고령화 시대의 소멸되는 노동력을 막기 위해 여성경제 참여를 더 확대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세상의 동반자로서 여성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기를 원한다.
[2017년 7월 17일 제90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