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퇴임기념으로, 나는 ‘모녀5세대’란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에서의 5세대란 1909년 출생한 외할머니, 1928년생 어머니, 1950년생 나, 1977년생 딸, 2005년생 손녀까지를 말한다. 특히 외할머니의 삶을 조망하면서, 한 여성의 삶이 후대에까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가를 알았다.
비록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한 민초의 삶에 불과하였지만 가까이 들여다 본 외할머니의 삶에는 수만 가지의 의미들이 있었다. 김복동(金福童), 1926년 경상남도 양산 출신. 15세 때(1940년)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 홍콩,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를 거쳐 8년째인 1947년, 22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녀가 2019년 1월 28일, 93세로 별세하셨다(경향신문, 2019.1.30. 참조). 그녀는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 평화주의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불리어졌다.
만일 당신이 , 일제식민시대인 1925년 전후 태어난 여성으로,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에 의해 끌려가, 모진 삶(종군 위안부보다 더 모질고 힘든 삶이 여성에게는 있을 수 있을까?)을 살다가 돌아온 여성이라면? 만일 내가 그런 처지였다면?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난 뒤,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여 승화시킨다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다.
내손을 잡아주는 동지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과거에 찍혀 있는 그 곤고한 삶의 역사적 의미를 알고, 그 의미를 역사적 과제로, 여성문제의 의제로 만들어 내기까지에는 피해여성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녀의 삶에 ‘나’를 대치시켜 넣어보는 순간, 나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숭고한 일을 하고 가셨는가를 더욱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도 욕을 하였다.
특히 2015년 박근혜정부가 피해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했다는 보도이후, 사람들은 ‘그게 뭐 자랑이냐고, 저리 나서느냐고 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인생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그녀보다는 대통령이 더 옳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누가 더 역사 발전에긍정적 기여를 하였는가? 그녀의 그 고행이 한국역사, 그것도 여성의 역사와 국가권력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는지? 그녀와 그녀의 동지들이 아니면 밝힐 수 없을, ‘전쟁과 여성’이란 주제를 분명히 해 주었으니, 그녀는 참 위대한 삶을 살다간 여성이었다.
살면서, 고초는 누구나 당한다. 인생의 그림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드리워지는 가는 예측할 수가 없다. 28년생인 어머니도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동네 아는 친구들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끌려 간 것은 천운이었고, 그건 당사자의 공이 아니었다. 그건 운명일 뿐이었다.
그 운명에서 헤쳐 나와, 내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한민국의 여성으로 그런 짓거리를 당했다라는 것을, 국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건 반인륜적 작태였다는 것을, 일본의 진정한 사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히 세계만방에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는 괴로웠지만 후손인 우리들에게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그 만행을 다 이야기 해주고 그녀는 갔다 - 1992년 아시아 연대회의와 1993년 세계인권대회 증언, 2012년 전쟁에 의한 피해여성들을 돕기 위한 ‘나비기금’ 발족, 2014년 ‘김복동의 희망장학재단’ 발족, 2015년 국경없는 기자회가 선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으로 선정, 2017년 정의기억 재단의 여성인권상 수상 등은 그녀의 또 다른 흔적이고, 종군위안부였던 그녀의 삶이 다른 의미로 탄생된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비록 그녀는, 위대한 그녀는 갔지만, 아직 23명의 위안부피해자 생존자가 계시고, 아직 바른 역사는 세워지지도 못하고 있다. 남은 것은 후손인 우리들의 몫, ‘인간적 도리’가 남아있다.
[2019년 2월 25일 제109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