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한복디자이너 주정하 혼례문화원 예절사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그는 많은 타이틀을 갖고 있다. 국가공인 보석감정사, 쥬얼리 코디네이터, 혼례 예절전문가, 우리옷 디자이너, 천연보석디자이너, 다도전문가... 50대 후반에 보석감정사(A.G.K)에 도전, 보석디자인과 전통 우리옷 디자이너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주정하(71) 조선명품 천연보석 전문 대표. 그의 타고난 미학적 안목은 고품격의 멋을 추구하는 고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인생을 정리하고 여가를 즐길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 주대표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은 타고난 복이 아니겠냐”며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미적 감각이 타고나 이화여대 시절 인사동을 기웃거리며 골동품 민예품 등을 즐기며 전통미학에 매료되었다고. “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당시 이과였던지라 수학이 싫어서 국문과를 선택하게 됐다”는 주대표는 대학졸업 후 36년간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었다. 그러면서도 문화에 대한 갈증은 배낭여행으로 길을 인도했고, 교사시절 방학이면 한달여간 무작정 해외로 떠나 견문을 넓혔다.
“9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여자가 어딜하던 시절인데 여성권익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지 않았죠. 하루는 아들이 엄마는 방학만 되면 혼자 떠난다며 약간의 불만을 제기하는 거예요. 그때 내가 한 말이 엄마도 그만한 권리는 있어 라며 처음으로 엄마의 권리라는 말을 사용하며 스스로 뿌듯했죠.”
단 한번도 혼자 떠나는 여행에 딴지를 걸거나 무조건 일주일에 한 번은 사진을 찍으러 다니거나 영화나 공연을 즐기는 생활을 해온 아내에게 불평 한번 한 적이 없는 남편을 보면서 정말 훌륭하고 사고가 열려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과 살아가면서 더욱 근사한 남자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주대표.
그는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세계 각국의 문화를 체험하며 아티스트로서 감각과 안목을 키울 수 있도록 말없이 응원해준 남편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해외 여러나라를 다니다가 구입 해온것, 국내 이곳저곳에서 구입해온 골동품까지 집 곳곳에 너절하게 늘어놓아도 뭣하러그런 것들을 사들이는지 묻거나 간섭하지 않는 남편이 고맙다”는 주대표는 지금도 일년에 몇 차례 해외 보석 박람회나 자유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주대표의 남편은 전 부산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을 지낸 철학박사 하일민 교수다. 한 때 김대중 정권시절 여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 안상영 당시 시장에게 패해, 많은 선거빚을 떠안았었다. 시장후보로 출마한 남편을 도와 묵묵히 내조를 아끼지 않았던 주대표는 낙선후 교직을 명퇴하고 가계살림을 도맡아 빚청산에 일조하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했다.
36년 교직접고 새인생 도전
63세에 보석감정사 취득
쥬얼리 및 우리옷 디자인
처음 평생 모아온 아끼던 고미술품과 보석, 귀한 장신구들을 처분할 때는 장사치가 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는 그는 취미생활이 평생 새로운 도전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가장 기쁘게 할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한 작품 한 작품 만들어낼 때의 성취감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지요.”
일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은 많지만 셈을 할 줄 몰라 어렵게 공들여 만든 작품도 다른 곳에 비해 낮은 가격에 팔아 큰 소득은 안되지만 15평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탐나는 물건 사들이며 적성에 맞는 일을 할수 있는 정도만 되면 되지 않겠냐는 소박한 예술가다. “게다가 대중교통 이용하니 자동차 유지비용도 줄일 수 있고 군직원 안쓰고 손수다 일하니 인건비도 안들어 고객들에게 고품격의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제가 만드는 제품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죠. 모두가 품격이 다르다고 말해요.” 소품 하나를 골라도 최고를 고집하는 탓에 고급 혼수를 장만하는 주변 지인들은 응당 주대표의 작품만을 선호한다. “예쁜 건 저의 신앙이자 종교였어요. 골동품이 아니면 사지도 쓰지도 않았죠. 물론 갈수록 작품의 품격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타고난 미감 외에도 늘 공부하고 연구하고 보고 듣고 배우면서 갈고 닦아 멋지게 승화시킨 노력덕분이라 생각해요. 남이 뭐라하든 내 눈에 들면 최고라 생각하고요.”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 아름다움을 볼줄 아는 안목에 이르기까지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는 아직도 목소리가 카랑카랑 에너지가 넘칠 만큼 의욕적이다. “혼수품은 대를 물려주는 것이죠. 호화예식을 자제하는 대신 대를 이어 물려줄 상징적인 예물은 하나쯤 장만할 만하다”며고객들에게 혼수예물 상담도 해주고 있다.
2000년 딸 결혼식 때 예식비 300만원으로 치른 건전혼례담은 당시 언론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흔치 않은 건전혼례 사례였기 때문이다. 서울대 법학과 대학원까지 나와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퇴직 후 살림만 사는 딸에게 전통미학을 가르치고 자신의 분원 역할을 할 공방을 내주고 싶다는 주대표. 인생은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와 행복을 안겨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유순희 기자
[2013년11월19일 제46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