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림 잎사귀회 중앙회 회장
한국의 꽃꽂이, 꽃예술 1세대. 반세기가 넘은 세월동안 꽃과 함께해온, 삶 자체가 꽃길인 여천 문상림(77) 잎사귀회 중앙회 회장. 부산에 적을 두고 있지만 중앙무대에서도 폭넓은 인맥을 형성, 그를 통하면 뭐든 다 된다고 할 정도로 능력있는 로비스트였고, 산수(傘壽)를 눈앞에 둔 지금도 왕성한 전국구 마당발로 통한다.
어떤 이들로부터는 바른 말 잘하고 대책없이 정의감에 넘치는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별난 어른'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잘못된것은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고 혼줄이 나도록 훈계를 하는 통에 문하생들에게는 더 없이 엄한 사범이었지만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는 속정깊은 사람이다. 수십 년 전 그들이 아직도 주변인으로 머물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탁월한 인맥관리능력의 일면을 엿보게도 한다.
얼마전 문회장은 한국예총으로부터 꽃예술문화대상을 수상했다. 한국동란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국민들의 정서순화차원에서 꽃을 보급하고 꽃예술의 대중화를 위해한결같이 꽃길 외길을 오롯이 걸어온 그가 꽃꽂이가 예술로 인정받은 이후 처음받는 상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물론 응당 부산시 문화상, 향토 문화상은 일찌감치 받은 그다.
어찌했건 오랫동안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필자는 민족애와 나라사랑하는 마음하나만큼은 유별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것도 공직에 적을 두지도 않은 평범한 여성으로서 말이다.
꽃꽂이계에서 그의 업적을 꼽으라면 책을 여러 권 펴내도 부족하다. 59년 잎사귀회 창립이후 지금까지 국내외 대형 전시회만도 70여회, 관련 세미나도 200여회가 넘는다. 지난 50여년간 방송과 저서를 통해 꽃을 매개로한 국민정서교육에 이바지한 바가 크니 관련 업계에서 가히 꽃예술의 대모라 일컬을만 하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전국의 꽃꽂이회를 규합 사단법인 협회를 창립하는 산파역할을 했고 사)한국꽃꽂이협회 제8대 이사장을 지낸 그는 현재까지 자문위원으로서 협회발전도 좌우지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평생교육원에 국내최초로 꽃예술 아카데미 과정을 개설, 10여년간 운영해오고 있고, 꽃꽂이를 예술로 승격시키는데도 기여했다. 88올림픽 성공기원 꽃예술전, 2005APEC정상회의장 꽃장식, 美워싱턴 참전국 용사 기념비 제막식꽃전시회 등 꽃의 날 제정 선포와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동양의 꽃예술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온 그는 꽃예술 민간사절로서도 왕성히활동했다. 이뿐인가. 세계 유일한 유엔공원 전몰용사 묘지에 지난 50여년간 헌화제를 한 해도 거르지않고 해온 공로 등을 인정받아 지난 2004년 호남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반세기 꽃예술 활동을 통한 공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과거해양수산부의 탄생과 존속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다. 그를 새삼 다시보게 한 대목이다.
우선 해수부 이야기로 들어가기전에 여천 문상림 회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회장은 경남 진해 출신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2남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명창 소리를 들었던 선친은 문회장이 두 돌이 넘기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모친은 5남매 모두일류대학에 진학시켜 훌륭히 키웠다. 그 시절 진해여고에서 서울대 음대를 진학한 문회장은 부친을 닮아 여중생때부터 노래를 잘해 이승만 대통령이 내려오면 차출되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공부, 노래, 연극, 미술까지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수재였다.
진해여고시절 6.25사변으로 지방에 내려왔던 서울의 일류대학 교수들로부터 여고수업지도를 받는 행운아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서울대 음대 재학시절 당시만해도 스무살이 결혼 적령기일 때 노처녀가될까 걱정한 어머니는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시집을 오니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의 본가는 당시 배 10척이 넘는 운항선을 소유한 현금이 많기로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생활이 여유로운 탓도 있었지만 결혼 후 피폐해진 국토를 아름답게 재생시키고 전쟁으로 상처입은 국민들의 정서를 순화시켜주기 위해 국내 최초 꽃꽂이회인 잎사귀회를설립했다. "어려서부터 늘 바다를 보고 살았고 가족과 형제들이 바다를 터전으로 업을 이루고 살았으며, 바다는 사춘기 소녀에게 문학적 영감과 책을 가까이 하게 만드는 원천이었다"는 문회장. 여고시절 엄청난 독서량으로 남다른 지식을 쌓을 수있었다고.
음대 진학해서도 바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고, 1961년 바다사랑 모임회를 구성해 바다와 연관된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이후 김영삼 대통령 후보시절 선거유세 차 부산상의에 왔을 때 해양수산부를 창설하겠다는 공약을 주의깊게 듣고 메모를 해두었다.문회장은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YS의 야당친구였던 김용성 전 헌정회 회장과 고문으로 동참한 김재철 동원참치 회장등과 함께 30여명으로 구성된 '신해양위원회'를 만들어 강남에서 월1회 포럼을 열며 해수부 설립을 위한 세미나와 잡지발간활동을 했다.
해양수산부 설립·존속 산파역할 바다사랑 지극한 여장부
50여년 UN묘지헌화…국제 꽃예술 교류 민간외교사절 역할
50여년 UN묘지헌화…국제 꽃예술 교류 민간외교사절 역할
당시 문회장은 이 모임의 부회장을 맡아 매달 200만원의 회비를 송금,잡지발간에 힘을 실었다.
이후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해양수산부 창설을 위한 조찬회를 주관했으며, 각계 전문가 교수 등을 초빙, 여론을 형성하며 해양수산부설립의 당위성과 이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 2년이 지나도 해수부 설립 소식이 없자 김광일YS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수부 설립 의지가 있는지 추진상황을 묻곤 했다. 해수부 설립관련 내용을 담은 책자를 청와대 보내는 등 적극적 노력을 했지만 김광일씨로부터 전해들은 말은 "늘 아직까지 구체성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문회장과 신해양위원회 간부들은 김영삼대통령 친견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청와대 접견실 옆 소회의장에 김용성 회장, 김광일 비서실장,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바로 옆에 배치된 자리에 문회장이 앉았다. 모두다 들어갈 때는 담판을 짓자고 의기양양하게 왔는데 막상 대통령을 만나니 아무말도 안하고 있어 문회장이 나섰다고.
문회장은 "대통령님, 저희들이 여기 온 목적을 비서실장으로부터보고받아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후보시절 부산 오셨을 때 대통령이 되면 해수부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저와 김용성 회장이 주측이 되어 신해양위원회를 만들어 잡지를 만들어가며 해수부 설립을 원하는 국민들의 뜻을 담았고, 필요성과 공감대 확산에 힘써왔으나 2년 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아 대통령님께 직언을 하러 왔습니다."
문회장이 입을 떼자 그제서야 한사람씩 발언을 시작했지만 김대통령은 여전히 쩝~ 입을 다시며 한마디도 안했다고. 다만 김대통령은 당시 문회장 일행이 미 클린턴의초청을 받아 보훈청 후원으로 워싱턴 한국전 참전국 용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두 트럭 분량 싣고간대형 꽃작품 전시회로 찬사를 받았던 이야기만 꺼내 아쉽게 면담의 시간을 다보내고 허탈하게 나섰다.
얼마 후 부산에서 '바다의 날'을 선포하는 행사에 김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문회장은 큰 돈을 들여 대형 꽃 전시회로 바다의날을 행사장 분위기를 업시켰고, 부산문화회관 오찬장에서도 김대통령 옆에 앉아 해수부 설립을 건의했다.
그리고 바다의 날 선포식이 있은후 보름만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해양수산부'가 탄생했다. 이를 기념문회장은 신상우 초대장관을 초청해 그랜드호텔에서 해양 세미나를거창하게 열었다. 대강당이 터져나갈 정도로 사람들이 참석했다.
"부산의 역사이자 대한민국의 역사였다"는 문회장. 일각에서는 해양수산부 장관감이라 놀리기도 했고 한 때 정치제의도 숱하게 받았다. 그러나 순수한 꽃 선생으로 남고싶었다는 문회장은 꽃 길외에는길이 아니라 여겼다.
해수부가 탄생하자 그제서야 국내 해양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DJ정권이 들어서면서 예산을 이유로 해수부를 없앤다는 말이 나와 또 한번 문회장과 신해양위원회는투쟁에 돌입하게 된다.과거 농수산부내 항만청을 두었던 것처럼 환원시키려고 하자 국회의원들을 모아 서라벌 호텔에서 주1회 조찬을 하며 해수부 존속여론을 형성해나갔다. 당시 부산지역국회의원 가운데 사상구 정형근 의원만 유일하게 뜻을 함께했다고.
이후 해양수산부 존속을 위해 서울 프레스센터내 해수부 부활운동 간판을 부치고 각 분야의 뜻을 모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한화갑의원도 포섭했다. 조성제 장관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서초동 아들집에 한달여 머물면서 해수부 부활운동을 했는데 남편도 이왕 시작한 거 뿌리 를 뽑으라며 응원해줘 고마웠다"는 문회장은 서울에서 살다시피하며 매일 청와대 가서 탄원서 내는 것을 밥먹듯했다. 바다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전국에서 다 모여 대규모 궐기대회를 열었다. 대통령 정식 취임되기 전 서울대 교수들도 동참했다.어느날 신구 대통령 청와대 조찬을 앞두고 김광일 비서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두 분이 조찬을 할때 탄원서를 전달하겠으니 급히 김대중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탄원서를 작성하면 도움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문회장은 하루전 김광일 실장을 만나 탄원서를 전달 한 뒤 조찬회가 끝날 예정시간인 8시10분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이날 새벽 6시프레스센터에는 해수부 존속을 열망하는 500여명 전국의 지도자들이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다고.
"조성제 장관 한화갑의원 수산계사람들 재향군인회 회장 등 나와함께 헤드 테이블에 앉아 전화연락이오기만을 학수고대했지요. 그러나 8시 10분이 넘어도 소식이 없다가 8시20분경 김광일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두분이 조찬회에서 해수부를 존속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문회장님 덕분입니다. 문상림만세!!'라고 하는 겁니다. 전화기를 놓고 대성통곡을 하며 엉엉 울자기다렸던 모든 사람들이 헹가래를 치며 홀을 빙빙 돌았지요. 마스카라가 떨어지고 립스틱이 엉망으로 번졌지만 그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명색이 해양도시 부산이야말로 바다를 관문으로 하고 있고 관련업종사자도 많은 도시인데 당시 부산의 국회의원은 한 명도 안왔다는 문회장.(문회장은 이 대목에서 한 '놈'도 안왔다고 표현했다) 당시만해도 시민단체들이 해수부 운동에관심이 미흡했다고 .
문회장은 "MB정권들어서면서 역사적인 해수부가 폐지되고 다시차기 정권을 이끌어갈 대선후보들이 뒤늦게나마 해수부 부활을 약속하니 기대가 크지만 그 기능과 역할이 강화되기까지 관심의 끈을 늦추어선 안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꽃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바다사랑 열정도 대단했던 문회장. 그는꽃 중에서도 매화를 사랑한다. 매화를 닮고 싶어하는 그의 삶과 정신이 오롯이 담긴 꽃이기도 하기때문이다. 매년 봄 매화꽃 강좌를 통해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그 운치를 지니며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퇴계 선생의 매화예찬론을 펴고있는 그는 무궁화사랑운동에도 누구보다 힘썼다. 행사장 '코사지'는 늘 무궁화를 사용하고 귀한 자리 꽃바구니 선물엔 무궁화가 단골이다.
무궁화를 그리워하는 해외 동포들에게 무상으로 보내고, 보훈청의후원을 받아내 해외 동포들에게 태극기를 보내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했다.무궁화, 꽃, 나라사랑과 관련한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사비를 털어서라도 나서는 문상림회장. 그러나 그 꽃길인생여정에 기쁨과 보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대형 꽃전시 후원금을 둘러싼 사건이다.
"YS와 야권운동 동기인 변상경씨가 항만계통(콘테이너 사장)의실세로 있던 시절 여기저기 스폰을많이 했는데 제2회 바다의 날 기념꽃전시회를 할 때 포항서 대형 목선을 트럭에 운반해와 행사를 크게준비했다. 전시장 가운데 목선을 두고 디스플레이를 하자니 비용도만만찮게 들어간다는 걸 알고 변씨가 스폰을 하겠다고 나섰고 업체들과 함께 광고를 내도록 하겠다며당시 200~300만원을 협찬한 적이있었다."
문제는 변씨가 DJ정권이 바뀌어도 그 자리를 내놓지 않자 화근이됐다. 당시 정권측에서 변씨의 공금사용에 관한 검찰조사를 하던 중문회장에게 광고비 형태로 지급된200만원 송금이 문제가 됐고 이 과정에서 문회장이 정치적 구속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변씨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나름 애를 썼는데 착하고 어진부분도 있는 사람이었다. 부정한 돈은 받지 않기로 유명하고 지금도 5천원이상은 사먹지도 않는 검소한사람이다. 그의 성정을 잘 알기에 개인적으로 유임운동을 좀 폈던 것도 화근이었다"고.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억울한 수감생활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꽃앞에 한 점 부끄럼없이 살았고 오직 꽃과 함께 깨끗하게 산 삶이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는 문회장. 어려울 때 꽃은 큰 힘이 되었고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꽃이었다고 말한다. "남은 생애도 나라사랑운동에 힘쓰고 싶습니다. 꽃사랑 운동은 죽을 때까지 할 작정이고요. 지고도이로운 꽃 매화의 철학과 매화정신을 앞으로도 널리 펴 나갈 겁니다.꽃이야말로 화합과 소통의 매개이기 때문입니다."
팔순을 앞둔 원로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천 문상림 회장. 지치지 않는 열정은 매일 아침 그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꽃향기 때문은 아닐까.
유순희 기자
[2012년 11월 19일 제36호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