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기획가, 아나운서, 프로듀서, 변호사, 대기업 건설사 임원, 전업주부, 경단녀...그리고 무엇보다 슈퍼우먼이 되어야했던 워킹맘. 불혹의 나이에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세아들을 양육하며 법대에 진학, 제2의 인생을 개척했던 도전적 삶의 주인공. 남과 비교하지 않으니 행복해지고,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무엇인가 알고 하니 성과가 있더라는 이현경 SK건설 상무. 오로지 겸손과 인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해주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음을 그녀는 잊지 않는다. 바다 빛이 아름다운 커피숍에서 가을, 그녀를 만났다. <편집자 주>
건설수주 클레임 협상
설득력 뛰어난 여성에 제격
국내 10대 건설사 가운데 여성임원은 단 3명. 건설업 업무는 특성상 남성중심의 성향이 짙고 남초 현상이 뚜렷한 대표적 직종으로 인식되어온 분야.때문에 관리직 및 임원부문에 여성의 비율이 여전히 낮은 게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건설분야가 남성적인 업무영역이라는 인식을 깨고 남성 못지않는 굵직한 미션들을 성공적으로 수행,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 바로 SK건설 이현경(55) 상무다. “협상, 조정, 설득력 등 내면까지도 읽어내는 섬세함은 여성특유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능력들이죠.
건설업은 퍼뜩 외형적인 하드웨어 부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속에 담기는 소프트웨어를 충족해야만 건축미와 건축의 가치가 살아나듯이 건설의 수주나 클레임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문제해결 과정을 통해 상대를 감복시킴으로써 최소의 손해, 최대의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죠.” 이 상무는 문제의 핵심과 펙트를 캐치하고 상대의 이해를 넘어 감동을 시킬 수 있는 설득력이야말로 잘 훈련된 여성들의 무기라고 꼽았다.
때문에 고도의 섬세한 협상을 필요로 하는 외교적 업무와 무역, 수주, 계약 등의 업무는 비록 거친 건설업일지라도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여성에 제격인 것같다고 말한다. 이현경 상무는 어느 날 갑자기 국내 굴지의 대표적 건설업 임원으로 내려앉은 건 아니다.
47세에 SK에 입사해 적지않은 나이에 부장부터 출발했다. 입사 후 자원해 해외수주 클레임 관리업무를 담당했고, 혁혁한 ? 성과로 2015년 상무로 승진, 올해 4년차 상무로 Prime Contract실장을 맡아 계약관련 업무 전반을 진행하고 있다.
길게 가려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해야
이현경 상무는 오클랜드 법대졸업 후 뉴질랜드에서 상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평통일원으로 청와대의 한 자문 콘퍼런스에 참여하며 국내 기업들과 자연스레 인연을 쌓았는데 여기서 SK임원과 연이 닿아 입사제의를 받았다. 즉석에서 면접을 보다시피한 인터뷰를 마치고 한국방문이후수 개월의 고민과 기도 끝에 10년여의 뉴질랜드 생활을 접고 한국행을 택했다. 그의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입사 초창기 SK건설에서 이 상무는 개발사업부문 소속 변호사로 근무 중 계약실에 꾸려진 TF팀에 자원했다. 계약실은 국내외 발주처 또는 하도급업체와의 계약을 총괄하는 부서로, 특히 공기(工期) 지연으로 발생하는 지체상금을 어느 쪽이 부담하느냐를 엄밀히 분석하고, 비용의 정산을 요청ㆍ설득하는 클레임 해결과정이 핵심 업무다.
중동지역 정유공장 등의 경우 저가 수주로 출혈경쟁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고, 공기지연에 따른 클레임 발생으로 심지어 9천억 손실의 상황에 처하기도 하는 등 10여년 전만해도 이 분야에 전문가가 없어 클레임 발생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당시 3명으로 출발한 TF는 현재 50여명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지난 5년간 연평균 1억5천만 달러(약 1천792억 원)정도를 발주처로부터 받아냈다.
마흔에 세 아들과 뉴질랜드 이민, 현지 변호사로 성공
힘들땐 ‘어라운드 코너’ 새기며 희망과 신앙심으로 극복
계약관련 업무전반 진행 TF팀 이끌며 회사이익 극대화
공기지연에 따른 배상을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게 되면서다. “당시 아무도 하지 않는 어려운 일이고 누구도 나서기 두려워하는 일이었지만, 전문가가 없다니 내가 하고싶다는 의욕이 막 솟구치더라구요. 가슴이마구 뛰었어요.” 뭔가 관심있는 일, 흥미로운 일을 접할 때, 가슴이 설레고 뛴다는 이 상무는 살아가면서 성취의 욕을 높여주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라고 말한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또 있다. 2014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와의 클레임 협상 자리. 사장급 수십 여명이 미팅하는 자리에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헬렌(이 상무의 영어이름)이 협상에 나타나면 십중팔구 밀리게 되자, 아예 협상자리 배석을 꺼리는 기업도 있다. "뒷자리에 앉아만 있는 조건으로 회의에 참석해 듣고만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앞에 나서서 얘기를 하게 되더라구요. 회사 명운이 달린 전장이라고 생각하니 목표에만 집중했고, 7개월간의 사투 끝에 약 1조에 가까운 거액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죠."
개척과 도전으로 점철된 워킹맘의 삶
이현경 상무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거손 광고대행사에 잠시 근무하다가 1986년 MBC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해 중간에 프로듀서(pd) 업무로 전환했다. 방송근무시절 중매결혼하여 두 아이 출산 후에도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아나운서는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내는 게 일반적이었던 때, 불편한 시선들도 있었지만 당당하게 스스로의 일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셋째를 임신하면서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갈등의 순간 “MBC의 내 자리는 누군가로 분명 대체될 수 있었지만, 세 아이의 엄마자리는 오직 나만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이 서자, 스스로 희생이 아닌 선택을 한 것이라며 용기를 가졌다.
결국 방송생활 12~3년여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 살, 세 살 터울의 아들 셋을 키우며 한국에서 4년여를 전업주부로 지냈다.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오로지 아이들을 키우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싱글맘이 됐다. 막막했다. 기도 중에 이민을 결정했다. 보다 '안전한 땅'에서 6살, 8살, 11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6개월전 먼저 떠난 이모가족을 의지삼아 뉴질랜드로 떠났다.
이 상무는 “어떠한 기회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가 끝이 막혀있는 터널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막막했지만, 그럴 때마다 기도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돌아본다. “어쩌면 제 인생은 마치 예비된 것인지도 몰라요. 만약 제가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서울대 영문과를 진학할 수 없었겠지요. 저는 공부밖에 할줄 아는게 없었어요. 아마도 요리나 스시를 좋아했다면 뉴질랜드에서 요리를 배워 스시집을 차렸겠죠.
다행히 영어를 공부한 덕분에 오클랜드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고, 오랜 공부 습관으로 변호사에 합격해 좋은 로펌에도 취업할 수 있었죠.” 그러나 피나는 눈물과 기도와 어려움이 고비고비 있었다는 이 상무는 외국에서 혼자 아이 셋을 키우며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퇴근 길에 차를 세우고 울기도 여러번 이었다고 회상한다.
힘들 때마다 그는 ‘어라운드 코너’를 되새긴다고. “이게 끝이 아니야, 이 모퉁이만 돌면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조금만 더 참자” 이렇게 다짐을 하곤 했다고 고백한다. 아이 셋을 태우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심정으로 매순간 열심히 벅차게 피와 땀으로 얼룩진 성실한 삶을 살아가길 희망하는 이 상무는 후배 여성 리더들에게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할 것”을 조언한다.
가슴 두근거림은 열정을 갖게 하고 열정이야말로 자기발전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전적으로 변화무쌍한 삶의 여정을 개척해왔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생각해요. 언젠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마음을 보듬어주는 일을 하고싶어요. 인생을 돌아보고 글도 쓰면서요.”
‘다니엘’ 보듯 매 순간 기도로 딸을 응원하는 친정 엄마, 그런 엄마로부터 모태신앙을 물려받아 어긋남 없이 살아왔다는 이 상무는 협상을 나설 때마다 엄마에게 기도부탁전화를 건다. 벼랑 끝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 세상에서 이겨낼 수 있었던 용기,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지탱해온 두 모녀의 사랑이 시큰하다.
유순희 기자
[2019년 10월 25일 제117호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