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 여성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물심양면 지원해온 ‘부용회(芙蓉會)’의 구니타 후사코(107) 회장을 만났다. 부산 한일친선협회 김영춘 회장과 동행해 동래구 온천동 구니타 회장의 자택을 방문한 날은 지난달 26일 일요일 오후.
깔끔한 하늘색 가디건 차림에 연한 화장, 곱게 염색한 머리...정갈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은 구니타 회장은 김 회장과는 시원시원한 일본어로, 기자와 대화할 땐 유창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편안한 대화를 나눴다.
아담한 아파트의 거실에는 쇼와 천황, 아베신타로 외무대신,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에히메현 지사 등으로부터 받은 표창장이 걸려 있었다. 구니타 회장은 특히 1986년 쇼와 천황의 표창장을 받기위해 도쿄 황궁을 방문해 천황과 대화를 나눈 일에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다. 대부분 부용회 회장을 맡아 헌신적인 활동을 한 공로에 대한 표창이다.
“사회복지사가 방문하는 날은 도움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아직도 뭐든 손수 다 한다”는 구니타 회장은 “강아지 데리고 옥상에 가서 상추에 물도 주고, 꽃도 키우고 소일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식사는 아주 소식하며 NHK 방송과 한국의 사극을 즐겨본다”는 그는 일본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식들과 왕래하면서, 손자들을 볼 때 행복해하는 여느 할머니와 같다.
‘부용회’는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회원들이 고령화되고 돌아가신 분도 많아 지금은 구니타회장의 바깥 활동이 거의 줄었지만, 그는 한평생 부용회 회원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회원들을 돕고 격려하고 부산에 있는 일본인 묘지 관리와 위령제 등, 필요한 사업들을 도맡아 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유학, 사업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 간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습을 피해 온 경우도 있고 해방 후 남편을 따라 한국에 들어온 일본 여성들이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부용회(芙蓉會)’ 회원들의 버팀목
아직도 손수 손빨래하고 소식하며 건강유지
해방직후 반일 감정이 극심할 때 한국에 온 그들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차별을 받고, 일본에서는 조선 사람과 결혼한 여자라며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다. 일부는 자신의 연고를 증명하지 못해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국적을 상실해, 해방 후 오랜 세월 한국에서 살았음에도 한국 국적이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구니타 회장은 전국에 있는 일본인 부인들을 위로하고 일본 방문을 기획하며, 일본에 돌아가지 못하고 나이 들어 혼자 사는 일본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양로원인 경주 나자레원도 수시로 방문해 왔다.
구니타 회장은 1935년 스무살 때, 자신의 고향인 시코쿠 섬 에히메현 니이하마시에서 기장 정관 출신인 조선 청년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이 조선인이라는 게 들통 날 게 두려워 결혼식을 하자마자 남편의 사업을 핑계로 나이가타로 가서 살면서 첫딸을 낳고, 1939년 남편을 따라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왔다. 당시 만삭의 몸으로 배를 탔다가 배 위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정착한 곳은 남편의 고향인 현재의 기장군 정관면이다. 대지주의 3남 중 막내였던 남편은 이웃들에게 덕을 많이 베풀어 “한인, 일본인 구분없이 땅을 내주고 먹거리를 나누어 주고 일본 여성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지 않도록 늘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설날이 되면 4대에 걸친 40여 명의 후손들과 부산이나 일본에 사는 자식들이 찾아와 정관에 있는 큰아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구니타 회장 집에서는 일본 음식을 차려 같이 먹는다”며 가족애도 드러냈다.
구니타 회장은 부유한 남편과 시댁 식구들 덕분에 한국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내면서,한국에 온 일본인 부인들을 집에 초대해 같이 일본어로 수다도 떨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챙기며 살아왔다.
이제 107세의 고령에 거동이 힘들어지고 회원들도 급감해 구니타 회장의 역할은 상징적이지만, 그는 눈을 감기 전에 한국과 일본이 진정으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과 고손자들이 한국과 일본 할것없이 마음편하게 왕래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박정은 기자
[2022년 7월 22일 146호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