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몰의 은은한 빛에 매료되어 진한 커피 향을 찾아 카페테리아에 들어선 순간,지난 인생의 여정을 잔잔한 언어로 쏟아내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노래와 연주가 잔잔한 감동으로 오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깊은 커피향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담담히 들려준다. 그리고 고단했던 지난 과거는 상처가 아닌 풍요로 우리의 미각과 감성을 사로잡는다.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통한 ‘라틴’과 ‘아메리카’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공존의 역사는 거리의 일상과 건축을 통해 우리에게 기록처럼 전해주었다. 이러한 두 문화의 공존 속에 설탕은 작물로서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역사에 밑거름이 되었다.
15세기 원주민 문명의 파괴를 바탕으로 시작된 ‘라틴’과 ‘아메리카’의 만남은 16세기 설탕을 매개로 또 다시 검은 역사와 조우하였다. 아메리카의 원주민과 유럽의 백인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이 만나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문화는 완성된 것이다.
더 이상 원주민만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할 수 없으며, 백인과 흑인만으로도 라틴아메리카를 말할 수는 없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카리브 해 국가이기도 하다. 멕시코를 포함하여 중앙아메리카, 남미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카리브 해 연안국가에 속한다.
카리브해 도미니카 공화국 거리
또한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코스타리카는 카리브 해 위치한 스페인 식민지였다. 16세기부터 영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패권에 맞서 카리브 해 도서 국가들을 점령하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도 일부지역을 차지하였다. 카리브 해 지역은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광활한 대륙은 이미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차지하였고, 서구 열강은 카리브 해 도서지역을 둘러싸고 경쟁하였다.
영국은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였고 카리브 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노예무역을 주도하며 단맛에 중독된 유럽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스페인은 영국에 맞서 카리브 해 지역식민영토 보호를 위해 성을 건설하였다.
스페인인 카리브해에 건설한 성
16세기 이후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은 세계 설탕산업을 주도하며 미각자본주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특히 브라질, 쿠바, 아이티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는 단맛을 탐하던 유럽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사탕수수 농장과 더 많은 노예를 확보해야만 했다.
유럽인에 의해 전해진 병균과 가혹한 노동력에 시달려 원주민은 멸절되어 갔고, 부족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제가도입되었다. 예전부터 아프리카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이 패배한 부족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전통이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단맛에 중독된 유럽인에 의해 인간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역으로 활용되었다.1518년 최초로 노예할당권이 독점판매 되기 시작하여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19세기 말까지 거의 400여 년 동안 아메리카 땅에 1,200만명의 아프리카인이 상품으로 거래되었다.
설탕을 매개로 한 흑백의 조우 새로운 역사 밑거름 돼
단맛에 중독된 유럽인 흑인노예 무역시장 거래수단으로
단맛에 중독된 유럽인 흑인노예 무역시장 거래수단으로
유럽의 자본과 아메리카의 대지 그리고 아프리카인의 고통이 결합되어 인간의 혀끝은 달콤하게 치장되었다. 서구 열강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재배하기 시작한 작물은 담배였다.
담배는 상류층 호사품이었으나 17세기 평민들의 소비품으로 확산되었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령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설탕이 담배 재배를 앞지르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커피와 초콜릿이 대중적으로 유행하자 유럽의 설탕소비량은 세배로 증가하였다.
설탕은 가장 강한 권력과 가장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사탕수수는 뉴기니에서 최초로 재배되었고 인도에서 최초로 가공되었다. 7세기 아랍팽창기에 지중해 연변 키프러스, 시칠리아 몰타그리고 스페인의 그라나다 지방에 전해졌다.
남부 유럽인들에게 단맛을 전해준 것은 이슬람세력이었다. 그리고 사탕수수는 16세기 컬럼부스에 의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운반되었다.컬럼부스 2차 항해 때 쿠바로 유입된 사탕수수는 스페인사람들에 의해 서인도제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카리브 해 지역은 세계시장을 겨냥한 거대한 설탕 생산지로 변모하였다. 1492년 콜럼부스 항해 이후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은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그리고 마드리드 등 보다 넓은 세계와 뒤얽혀 있었다.
자본주의 기업 형 제당소로 채워진 푸른빛의 카리브 해는 검은 빛으로 물들어 갔고, 노예의 탄식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압축기의 소음과 채찍소리에 묻혀 400년 동안 허공을 맴돌았다.
세비야 보스턴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의 욕구는 아프리카인의 땀과 눈물로 채워졌다.라틴아메리카의 백인엘리트는 노예해방을 조건으로 아프리카계 후손을 독립전쟁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새로운 국가건설과정에서 흑인의 공로는 은폐되었으며 오히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인종을 야만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는공고화되었다.
식민시대 노예제도는 흑인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창조했고, 이러한 역사는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이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행사해왔다. 아직도 아프리카계 후손은 노예제가 지니고 있던 차별주의가 사회의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부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인종은 뿌리의식을 상실하고 자신의 문화를 여전히 미개하며 현대사회에서 사라져 버려야한다는 백인주류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과거와 단절된 삶을 추구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공식 역사에서 기록으로 남아있는 흑인의 흔적은 그저 백인에 의해 기록된 흑인의 역사였다. 백인의 상상력에 의해 주입된 인종적 질서아래 아프리카계 후손의 역사문화적 업적은왜곡되었거나 삭제되었다.
[2016년 1월 25일 제72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