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19일

라틴아메리카 이야기

세상의 변화를 수용한 21세기 “탱고”

 
 
 
아스트로 피아졸라(Astro Piazzolla)그는 탱고 암살자라고 불릴 만하다. 재즈와 클래식에 이르는 폭넓은 음악적 이해를 바탕으로 아방가르드 한 음악을 선보인 피아졸라에게 많은 사람들이 매혹되었다.

이제 탱고는 구석진 항구에서 부두 노동자의 고단한 하루를 달래주던 “비천한 이방인의 감성”에 국한되지 않았다. 세계가 문을 열어 환영하는 주류 감성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도네온 연주가이며 작곡가였던 피아졸라는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 음악 그리고 미국의 재즈를 접목시켜 ‘새로운 탱고’라는 의미의‘누에보 탱고(Nuevo Tango)’를 세상에 선보였다.
 
피아졸라의 실험적인 음악은 거부당하기 일쑤였고, 그의 음악적 열정은 매번 상처로 신음했다. 탱고를 떠나 클래식에 전념했지만 자신이원하는 색채의 음악을 그릴 수 없었다.

흩어진 마음의 틈을 메꾸려 떠난 파리에서 그는 운명처럼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그의 가르침은 피아졸라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목말라했던 음악은 클럽에서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던 탱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에보 탱고’는 탱고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르헨티나에서 탱고의 대중화는 “돈 크라이 포미 아르헨티나”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에비타(EvaPerón)와 무관하지 않다. 에비타는 1919년 시골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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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로 피아졸라의 음반 / 영화 에비타 포스터                      
 
그녀는 15세 때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하여 무명배우로 활동하면서 1943년 장래가 총망하던 당시 육군 대령이던 후안페론(Juan Perón)을 만났다. 페론은 헌신적인 에비타의 사랑을 신뢰하여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 번영의 미래로 가득했던 세계 4대 강국 아르헨티나는 페론에 의해 총치되었다. 노동자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페론은 친 노동정책을 통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한 페론은 노동자의 문화로 천대받던 탱고를 국민문화로 장려하고 확산하였다. 그러나 에비타는 폭넓은 민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정권 강화를 위해 자신과 페론의 우상화 작업을 시작 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며 정치적 숙적을 철저하게 핍박하였다. 페론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한 공업계획과 파격적인 포퓰리즘 정책은 국내 경제 악화의 원인으로 작용 하였다.

이러한 상황아래 권력의 정점에서 있던 에비타는 자궁암 진단을 받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과 작별 하였다. 독재자의 아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서민의 대변자로서 존경받던 그녀의 사망은 아르헨티나를 울렸다.

이후 페론과 에비타는 국가 경제 파탄의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 페론과 에비타는 노동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1955년 이후 30년간 아르헨티나에는 군사독재가 이어졌다. 그리고 페론의 민족주의가 육성시킨 탱고는 집회와 결사의 금지 아래 엄격히 탄압되었다.

1983년 군사독재는 종식되었으나 탱고는 이미 로큰롤과 스윙에 가려 낡고 고루한 문화로 인식되었다. 계엄령과 군사정권의 지속 그리고 급격히 유입된 미국문화로 탱고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탱고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댄스파티는 불가능했으나 여전히 사람들은 탱고를 즐겼다. 코페스를 비롯한 프로무용수들은 동작을 분석하여 오늘날 표준이 된
탱고 8스텝 살리다(Salida), 오쵸(Ocho), 간쵸(Gancho), 히로(Giro)등을 규격화 시켰다.
 
동시에 코페스는 살롱댄스가 아닌 뮤지컬 형식의 탱고 쇼를 고안해 내었다. 남자끼리 칼을 들고 추는 무술 탱고, 귀족들의 살롱탱고를 줄거리로 하는 탱고쇼는 희미해 가는 탱고에 불을 밝혔다.
 
 
브로드웨이 포에버 탱고 공연 포스터.jpg
 브로드웨이 포에버 탱고 공연 포스터

 
1970년대 접어들어 민족문화 육성이라는 프로젝트아래 정부의 지원으로 아르헨티나의 음악가와 탱고 무용수 그리고 뮤지컬 제작자는 탱고 쇼를 합작하였다.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전 세계는 탱고 쇼에 열광하였다.
 
화려한 의상과 무대 그리고 매혹적인 동작은 ‘아르헨티나 탱고’를 구식으로 치부해 버렸던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90년대 탱고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많은 탱고 무용수들이 미국을 비롯한 유럽으로 이주함으로써 ‘아르헨티나 탱고’가 세계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적인 요소와 화려함이 가미된 ‘포에버 탱고(Forever Tango)’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제 탱고는 탄생과 쇠퇴 그리고 성장과 확산을 넘어 21세기 변화를 수용하고 부응해 나아가야 할 시점에 놓여있다.
 
 
차경미 교수2.jpg
 
[2016927일 제8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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