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21일

세기의 로맨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세기의 로맨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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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족적을 남긴 음악계의 거장, 그들의 사랑도 마모되지 않은 불멸의 신화로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며 회자되고 있다.
 
먼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리던 클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 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진 이후 해외 연주회만 38회를 열 정도였다. 리스트는 그녀를 ‘천재소녀’로 불렀으며 괴테, 멘델스존 등 명망 높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열렬한 팬이되었고 후원을 자청할 정도였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였던 그녀의 아버지 비크는 딸을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키워 돈과 명예라는 두 마라의 토끼를 잡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했던 비크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계획을 가졌지만 세상만사가 여의하던가? 운명은 그의 편에 서지 않았다. 부친에게 고분고분하며 혹독한 피아노 훈련에도 견뎌내던 딸이 사랑에 빠지게 되고, 불타오르던 그녀의 사랑을 끄게 할 아무런 묘안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바로 낭만파 음악의 선구자인 로베르트 슈만이었다.
 
그는 비크의 제자였으며 비크 집에서 하숙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꿈꾸지만 약지가 문제가 있었고, 장래가 불투명하며, 딸보다 9살이나 많은 그에게 사랑과 결혼에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클라라가 18세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는데 아버지의 끈질긴 방해로 두 사람은 법정에 서게되었고, 3년여의 법정 투쟁 끝에 법원은 두사람의 편을 들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클라라는 21번째의 생일을 하루 남긴 1840년 9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부모보다 사랑을 선택한 그녀는 이후 6명의 자녀를 낳아 집안일을 돌보느라 음악과는 담을 쌓을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슈만은 결혼초기부터 발병한 두통과 환각이 심해졌고, 급기야는 끔찍한 환청에 비명을 지르다가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자살을 목적으로 라인 강에 뛰어들었는데 그사건 후 스스로 정신병원행을 택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실어증에다 거식증까지 겹쳐 결국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의 나이 불과 46세였다. 음악가로서 여자로서 더할 수 없는 행복을 안겨준 영원한 사랑의 반려자는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다. 그녀의 뱃속에는 7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혼 전 클라라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로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등 많은 걸작을 남겼고, 피아노 독주곡은 대부분 클라라를 향한 사랑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클라라 역시 그녀가 연주회를 마치고 일어서면 멀리서 웃고 있던 그가 있었기에 연주할 수 있었다는 그 슈만은 가고 말았다. 그로인해 엄청난 상실감과 절망감으로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었다.
 
즉 그녀의 삶이 막바지를 향하여 치닫고 있을 때 안전장치와도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 또 하나의 운명으로 왔던 그 남자.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였다. 그녀가 가장 참담했던 시절에 보다 형형한 눈빛으로 다가와 잡다한 집안일을 보살피고, 아이들까지 챙겨주면서 클라라에게 삶의 위안을 주고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인물이었다.
 
그러면 브람스를 어떻게 하여 만나게 되었던가?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로서 맨 처음 슈만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땐 함부르크 출신의 갓 스무 살 무명의 청년이었다. 그가 후일의 은사이며 후견인 앞에서 연주를 시작하자 기적에 가까운 이변이 일어났다. 그의 천재성을 보았던 슈만은 몹시 들뜬 목소리로 아내인 클라라를 불렀다. “다이아몬드처럼 순수하고 눈처럼 부드럽다.”고 표현한 남편의 감격적인 언사에서 이 무명청년은 이미 미래의 유망주로 성공이 점쳐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는 슈만의 활력소이자 못다 한 꿈이었고, 손꼽아 기다리던 새로운 세대였다. 클라라에게도 신선한 자극제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 부부에겐 하나의 경이였고 삶의 광채였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 가고, 불행과 시련이 가중되어 상처투성이인 채로 남아있을때 그녀 곁에는 수호신 같은 14살 연하의 브람스가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풋풋한 20대부터 사랑을 키워가던 브람스의 생애에 급기야는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브람스의 생애에서 최대의 사랑은 오직 클라라뿐이었다.
모든 여성에게서 그녀가 보였다고 했다. 그의 첫사랑이요, 마지막 사랑이었다. 젊고 아름다웠던 클라라뿐만 아니라, 늙어 주름진 얼굴에다 병든 육신의 클라라를 처음처럼 한결같이 사랑했던 브람스. 슈만이 사망한 뒤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며 독일 레퀴엠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클라라를 위한 레퀴엠이었다.
 
그렇다면 브람스가 클라라만을 사랑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의 로맨스에는 클라라를 포함해 다섯 여인이 등장한다. 모두 음악가들이었다. 이들 중 아가테 지볼트와는 약혼까지 한 사이였지만 파혼하고 만다.
 
클라라가 아닌 바에야 자유롭고 싶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일까? 브람스의 이런 사랑에 대한 클라라의 사랑은 해저처럼 내밀히 흐르는, 보다 정제되고 차원 높은 사랑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음악도 그도 진심으로 아끼고 응원하고 지지했다. 그녀는 그의 곡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하기 시작하여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에 힘을 쏟았으며, 브람스의 성공에 직 ·간접으로 기여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베푼 사랑과 배려, 감사에 대한 보답이되길 바라던 것이다. 그녀는 말년에 다음의 말을 남겼다.
 
“그와 슈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내 인생의 가장 고귀한 풍요로움과 가장 고상한 실체를 구현하게 해줬어요.”의미심장한 대목이며 이보다 더 적절한표현은 없으리라. 클라라는 1896년 초 뇌졸중으로 사망했는데 향년 77세였다. 그런데 그녀가사망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때 브람스 역시 세상을 떠나 평생토록 사모하던 여인 곁으로 갔다.
 
[2015625일 제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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