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그녀는 생존 당시에도 ‘살아있는 전설’로 불릴 정도로 잉걸불 같은 열정과 도전으로 패션의 혁명을 이루어 낸 장본인이었다. “유행은 지나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샤넬의 명언처럼 그녀가 남긴 스타일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해서 아직도 세계여성들에게 독특한 향기와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의상, 화장품, 구두, 액세서리 등 두 개의 C자 모양의 로고만 봐도 바로 제일의 패션을 선도하는 보증수표로 생각하게 한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멋진 삶을 살다 간 디자이너, 옷에 구속받던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옷을 통하여 해방을 안겨 준 선구자였다.
고아원과 밤무대 가수
그런데 샤넬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이었는데 왜 코코 샤넬이된 것일까? 그 전말은 그녀가 늘 그 이력에서 송두리째 빼고 싶어 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가난한 장돌뱅이 아버지 알베르 샤넬과 어머니 쟌 샤넬 사이에서 3남 3녀의 둘째딸로 태어나지만 샤넬이 12살 때 어머니는 과로와 결핵으로 사망한다. 자식을 키울 마음이 없었던 아버지는 언니와 함께 오마진의 고아원으로 보낸다.
그 곳은 수녀원에서 기숙학교와 고아원을 운영하는 곳으로 가브리엘은 여기서 성장하게 된다. 이후 보조양재사, 밤무대 가수로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계를 꾸려갈 정도였다. 물랭의 로통드 뮤직홀에서 그가 부룬 노래는 ‘코코리코’, 즉 꼬꼬댁 꼬꼬댁을 표하는 프랑스의 의성어이며, 또한 ‘갈리아 수탉들’로 애국자의 외침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한다.
두 번째의 노래는 ‘누가 코코를 보았는가’이다. 이 노래는 코코라는 후렴으로 이어졌는데 단골손님이었던 군인들은 그녀의 개성 넘치고, 독특한 음색의 노래를 들으면서 “앙코르 앙코르 코코 샤넬을 연호할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다. 이때부터 코코 샤넬이 애칭이 되어 그녀의 인생과 함께 한다.
그런데 물랭은 어떤 곳이었던가? 프랑스 기병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도시였고 그녀는 군인들과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장교 에티언 발장에 눈에 띄어 연인관계가 되면서 그의 집에 머물게 된다. 발장은 물랭에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그녀의 재능을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발장의 집에서 접하게 된 사교계, 화려하지만 흥청망청 붕붕떠 있는 생활은 그녀에게 권태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이런 텅 빈 내면의 방황 도중에 만난 남자. 그는 누구였을까? 바로 발장과는 친구 사이이며, 그의 저택에 자주 오는 아서 카펠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샤넬은 바로 사랑에 빠진다. 그는 영국의 사업가이며 훤칠한 미남에다 교양과 학식을 겸비한 폴로(말을 탄 채 하키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는 경기)선수였다. 냉정하고 교양을 갖춘 지식인인 그를 보고 ‘바로 이 사람’이란 확신과 함께 여태껏 느껴보지도 품어 보지도 못한 격렬한 사랑이 용솟음 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첫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샤넬의 재능과 계획을 지지·응원했고, 잠재력까지 끌어내주기까지 했다. “당신에게는 재능이 있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 보겠다는 당신의 생각도 중요하오. 필요하다면 내가 도와주겠소.”라고. 샤넬에게는 그가 연인이자 오빠인 동시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샤넬에게 예술계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함께 오페라 극장이나 연주 공연장을 자주 찾아다니면서 문화예술을 접하게 해주었다. 그의영향으로 자신감을 찾게 된 샤넬은 차츰 패션계의 금자탑을 쌓아가고 있었다.
사랑과 결혼은 별개
그런데도 그들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카펠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일정 선을 그었다. 이런 태도는 샤넬의 괴로움이기도 했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야심에 찬 그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여성, 곧 영국 출신의 귀족가문 여성과 결혼한다. 하지만 그의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은 친구관계를 유지했다. 그 얼마 후 자동차 사고로 카펠이 사망한 후 “나는 카펠을 잃으면서 많은 걸 잃었다”고 술회하면서 그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샤넬의 사랑은 여기서 끝났을까? 아니다. 그와의 사랑 후에도 샤넬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때마다 그 사랑들을 회피하지 않았고, 당대의 명망 높은 남자들과 당당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드미트리 대공, 웨스트민스터 공작, 초현실주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 13세 연하이며 적국의 장교였던 한스 군터 폰 딘클라게, 광고디자이너 이리브 등이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에게도 안주하지 않고평생 독신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수용했다고나 할까?
특히 그들 연인 중에서도 평생토록 숭배했던 사람은 르베르디였고,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심장마비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산돼버린 대상은 이리브였다. 이리브는 새로운 삶의 의미와 디자인의 영감을 샘솟게 한 인물로 샤넬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이 그들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도 우연의 일치였을까?
50대에도 열정적 사랑
샤넬이 50대 후반에 만난 미남 독일인 딘클라게는 열정적 사랑의대상으로 그녀의 오감을 확확 달아오르게 했던 인물이었다. 방탕아기질이 있었는데도 그에게 홀딱 빠지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가 해방될 때 독일군 점령시대 그들에게 협력한 죄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음으로서 그녀의 생애에 큰 흠집을 남긴다. 지인 처칠경의 도움으로 두세 시간 만에 방면되지만 자국 사람들의 공분을 산 사건이었다. 뜨거웠던 사랑이 죄가 되고 만것인가.
늘 특별한 사람이 되어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던 코코 샤넬. 1957년(74세)에는 미국 댈러스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의 패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패션계의 큰 별이었지만 고아원에서 시작된 몽유병이 평생을 괴롭히다가 만년에는 발작이 심해져서 가죽 띠로 자신을 침대에 묶고 자야할 정도였지만 당차게 자신의 분야에서 제일인자가 된 의지의 표상이기도 했다. 1971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코코 샤넬.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과 사랑도, 모든 여성들의 꿈이던 샤넬 마크도 특별한 빛과 향기를 뿜으며, 우리들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사실이다.
[2015년 5월 25일 제64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