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21일

세기의 로맨스

관념적 승화된 동성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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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 da Vinch). 그의 전기 작가인 바사리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자연을 초월하여, 단 한사람이 하늘로부터 기적적으로 아름다움, 우아함, 재능을 너무나 풍부하게 부여받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가는 경우가 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멋지고, 실로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분명 인간의 기술이 아닌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위의 대목에서 바사리가 다 빈치를 다소 이상화시켰다 해도 그의 본성에 상당히 근접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위대한 천재 중의 천재인 그의 사랑, 그 베일을 조심스레 걷어보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두렵기도 하다.
 
그의 내밀한 곳으로 다가가 설렘과 매혹에 빠져들게 하면서 불가사의한 영감을 부여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선생이 되었을 때 그의 제자인 아름다운 소년들과 젊은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으나 여성을 가까이 했다는 기록은없다. 다 빈치가 열정적으로 여자를 안아 본적이 있는 지는 미심쩍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제자들을 재능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보면서 선택한다는 것이 늘 강조되었다. 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전기 연구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다 빈치의 성적 충동은 동성을 향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했고, 실제 행동과 관련해서는 그의 리비도의상당 부분이 연구 충동에 의해 가려졌다고 보았다. 그것을 관념적인, 또는 승화된 동성애라 말했다. 즉 속으로는 동성을 좋아하지만 겉으로는 성행위를 하지 않는 수동적 동성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 빈치의 동성애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 프로이트는 그의 출생과 양육에서 원인을 찾아내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하고 살았던 탓에 모자 사이는 강한 애착 관계가 생기게 되고,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의 세례를 받고 자라면서 어머니 외의 다른 여성에게는 냉담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이 동성이라면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다 빈치의 제자 중에 자코모 살라이(Giacomo Salai)와 프란체스코 멜치(Francesco Melzi)에게 보여 준 그의 애정은 많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미적 충동과 영감을 부여한 사람은 아름다운 소년들

모자의 과도한 사랑 강한 애착 관계 다른여성에 냉담
 
   
먼저 살라이에 관한 것을 살펴보자. 1490년 성 막달라 마리아 날에 다 빈치를 방문했을 때 살라이는 10살이었는데 다 빈치 옷을 사고 옷값을 지불하기 위해 지갑에 넣어 둔 돈을 훔쳤다. 다 빈치가 이 사실을 아는데도 살라이는 자백하지 않았으며,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스승을 난처하게 했는데도 내치지 않고 잘 돌봐 주었다. 천덕스럽고 고아였던 살라이를 그의 조수, 제자,모델로 받아들이고 보살펴 준 것이다.
 
‘세례 요한’의 모델은 살라이였는데 이 사실만 보더라도 살라이에 대한 다 빈치의 사랑을 알 수 있게된다. 살라이의 매혹적인 면은 나무랄 데 없는 몸매와 균형 잡힌 얼굴, 숱이 많은 금발의 곱슬머리였다. 이러한 요소는 화가의 모델로는 이상적인 소년이었다. 후일 다빈치는 그를 위해 밀라노에 있는 자신의 땅에다 집을 지어주었고, 그곳의 포도밭을 물려주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다 빈치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제자는 프란체스코멜치였다. 밀라노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고귀한 성품을 지닌 그는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했다. 프랑수와 1세의 권고를 받고 앙부아즈 블루 성으로 이주 할 당시 23세였던 프란체스코는 여러 질환에 시달리던 늙은 스승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다 빈치와 그가 함께 보낸 해는 3년이었지만 마음만은 영원했다고 본다. 1452년 이탈리아 근교에서 태어나 결혼하지 않았던 다 빈치는 67세의 생일을 보내고 그 얼마 후인 1519년 5월 2일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말년을 함께 보낸 동반자프란체스코를 유언집행인이자 단독 상속인으로 임명했고 자신의 예술적, 학문적 유작 전체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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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는 임종 직전 그 사이 26세가 된 프란체스코의 팔에 의지한 채 종부성사를 받았다. 스승이 사망한 뒤 그 상실감을 극복할 수 없었던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스승은 자신에 대해 매우 정열적이며 타오르는 열정을 갖고 있었고, 내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나는 영원히 불행할 겁니다.”라고.
 
프란체스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사망한 뒤 50년을 더 살았고, 1570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천상에서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키워갔을 것이다.
 
 
[2015227일 제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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