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숙의 세기의로맨스<13>
생전에 ‘숭배’와 ‘비난’이라는 양극단에 위치하기도 했지만 불멸의 전설과 신화를 창조했던 여신 마리아 칼라스. 질풍과 같은 강렬한 개성 안에서 폭포수처럼 쏟아내던 재능으로 “음악의 대여사제”, “세계 최고의 드라마틱한 소프라노”, “세기의 프리마돈나”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폭식증의 96킬로그램의 뚱녀와 볼품없는 외모에다 고도의 근시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만 했던 그녀가 어떻게 하여 매혹적인 외모와 몸매로써 마모되지 않는 명성과 신화적인 인물이 된 것일까?
먼저 칼라스는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의 영향으로 그토록 엄청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는지 그녀의 출생과 교육, 특히 승부욕이 강했던 성격형성의 과정 등을 살펴보자.
칼라스는 1923년 12월 그리스에서 막 이주한 부부의 둘째딸로 뉴욕에서 태어났고, 극성스러운 어머니는 딸들을 그리스에서 성악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런 성격으로 부부간의 불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후일에는 별거를 거처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칼라스의 초라한 외모와 비만은 아름답고 날씬한 언니와는 늘 비교대상이 되기에 족했고, 부모의사랑이 비켜갔던 탓에 거칠고 반항적인 기질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인정할 때는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노래는 그녀의 존재이유가 되었다. 두드러진 승부욕에다 ‘앙칼진 칼라스’, ‘암표범’이라는 별명 등은 소외되었던 성장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즉 함께 출연했던 다른 가수들이 자신보다 박수를 더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천거한 가수라도 본인보다 돋보이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던 일화들이 입증 되기도 했다.
그리고 비만에다 별 주목받지 못하던 용모에 가슴앓이 하던 칼라스가 매혹적인 몸매와 미모로 변신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면서 주연 여우 오드리 햅번의 몸매와 미모에 반한 것이 다이어트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즉햅번이 칼라스의 롤 모델이 되었고 엄청난 감량의 촉매작용을 하게 했다. 햅번은 칼라스에게 행운의 여신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세계를 그녀의 품안에 안고 오페라의 전무후무한 대여사제로 등극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굶주렸고, 마음의 문을 닫았던 그녀가 가슴을 열어 사랑을 하게 된 사람이 왔다. 그는 누구일까? 연극과 영화의 명감독이던 루키노 비스콘티였다. 이 사랑에 도취되고 폭 빠졌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결별했다.
빗나간 부모의 사랑 소외된 성장과정 성격형성 영향
햅번은 변신의 조력자…잇단 사랑과 배신 미완의 삶
햅번은 변신의 조력자…잇단 사랑과 배신 미완의 삶
그러다가 1946년 바디스타 메네기니를 만났는데 메네기니는 그녀의 팬이자 후원자이며 매니저가 되었다. 28살이나 연상인 그와 1947년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칼라스의 성공은 상당한 재력가였던 그의 아낌없는 후원이 있었기에가능했다. 그녀의 음반제작과 각종 활동 비용을 전담함으로서 칼라스는 오직 노래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사람’을 만나 그의 연인이 되어 초호화요트를 타고, 다이아몬드, 진주를 위시하여 값나가는 보석을 사랑의 선물로 받으면서 은인이며 남편에게 등을 돌린다. 그녀의 남편 메네기니는 “아내는 내가 베풀어준 은혜를 등 뒤에서 칼을 꽂는 배신으로 되갚았다”고 분노했다.그녀는 먼저 이혼을 요구하며 7년동안 끌다가 이혼이 성사된다.
이렇게 배은망덕으로 남편을 배신하고 사랑에 눈이 멀게 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20세기의 세계적인 대 사업가였던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였다. 그의 연인이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색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녀와 연인관계로 있을 때 오나시스는 1남 1녀의 아버지로 아내를 둔 남자였다. 이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은 역사적인 로맨스로 회자되기도 했다.
칼라스는 왜 오나시스에게 그토록 빠졌을까? 그녀는 사교계의 위대한 숙녀가 되고 싶은 야심이 그 한 원인이었다. “저는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래서 생기 넘치고 화려한 아리스트를 만났을 때 저는 다른 여자가 되어 있었어요. 그와 함께 있으면 미친 듯이 행복했다”라고 했고 그와의 결혼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는 아내와의 이혼(후일 아내의 요구로 이혼했다)이나 그녀와의 결혼을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칼라스의 기쁨은 그에게는 대경실색일 정도로 동상이몽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아이는 낙태라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고, 자궁의 기형으로 제왕절개하여 낙태했다. 그렇지만 노래보다도 그가 우선이었고, 그가 없는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던 칼라스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사건이 날아들었다.
오나시스의 또 다른 여인의 출현과 결혼발표에 온 세상이 들끓었다. 그 여인은 미국의 35대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의 미망인이자 ‘세계의 연인’ 재클린이었고 밀회 후 그들은 1968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짜릿하고 달콤했던 칼라스와 그와의 사랑은 끝을 향해 달렸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칼라스는 죽어 가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는 결혼 후에도 두 여자와 양다리를 걸치기도 했지만 충격의 치유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오나시스에게도 치명적인 비운이 닥쳤다. 비행기사고로 아들이 죽었고, 재클린과의 불화, 이혼절차 등은 그의 병마를 깊게 하여 폐렴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부재로 칼라스는 깊어가는 고독과 공허감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과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쇼크성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음에 이른다.
오나시스가 먼 나라로 간지 2년후인 1977년 9월 16일, 그녀의 나이 불과 55세였고 자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시신은 재빨리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으나 도난을 당하기도 하다가 크리스티나요트를 타고, 그들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해에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
[2015년 11월 20일 제70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