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숙의 세기의로맨스<12>
이사도라 던컨과 마지막연인이자 그녀의 남편인 18살 연하의 러시아 출신 천재 시인 세르게이 예세인
하늘거리는 의상, 긴 스카프, 맨발의 무용가였던 이사도라는 현대무용의 혁신자로서 공인을 받고 있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는 고전무용인 발레만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발레와 같이 훈련된 몸짓이 아닌,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춤을 추고자 했다.
평생을 불꽃같은 열정으로 자유롭게 춤을 춘 그녀의 생애는 빛과 어둠이 극적으로 공존하면서 시대를 앞질러간 사람이 으레 겪어야 하는 숭배의 대상이 된 반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거의 독학으로 무용을 시작하여 후일 ‘자유무용의 창시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기도 했지만 대담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탓으로 호사가들에게 각종 가십(gossip)거리를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영감을 샘물처럼 자아올리며 신들린 춤사위로 세계를 향해 쏘아 올리던 화려한 명성의 토대는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 이사도라는 1878년 5월 27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시인인 아버지와 음악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타고난 예술인이 되기에 충분했지만,부모가 이혼함으로서 어린 시절을 힘겹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생애와 예술은 바다의 산물이다”고 강조할 만큼 바다는 많은 위안과 영감을 주었다. 바다의 파도와밀물과 썰물의 리듬은 그녀 춤의 결정적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또한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에서 춤동작, 즉 가벼운 팔놀림,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창조했다한다.
여기에다 롱펠로우의 시, 독서광으로서의 광범위한 독서, 그리스 예술과 니체의 철학, 고전음악, 뛰어난예술가들과의 유대 등은 그녀 춤의 경지를 한층 더 높였던 요인이었고, 그녀가 비상할 수 있는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그녀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허송하는 대신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짓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행동하는 적극적이고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예술적인 삶과 사랑에 대한 집요함도 그녀의 개성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불꽃같은 열정…자유롭게 자기생각 춤으로 표현해
사랑도 가로막을 수 없었던 ‘춤’ 원만치 못했던 결혼생활
그녀의 춤만큼 이나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남성편력이었다. 특히 늘 새로운 연인이 끊이지 않았으며, 당대 천재적인 남자들과의 뜨겁고도 짧은 사랑은 그녀의 생애에 장미의 가시로도 작용했다. 이사도라는 일찍이 언니와 함께 동네에서 춤을 가르쳤는데 그녀의 강습소에 학생으로 왔던 약제사 ‘버논’, 그 눈부실 정도의 미남을 향한 사랑에 빠진다. “무도회에서 그의 팔에 안겨 춤출 때 허공에 떠있는기분이었다”고 일기장에 고백할 때는 11살이었다. 2년이나 계속된 이정열은 그가 ‘어떤 여자’와 결혼함으로서 끝이 났다. 첫사랑은 나비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회전문처럼 드나들던 사랑의 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여름의 남자,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오스카 베레기(‘로미오’라부름)와의 사랑이다. 마음에 불을 지른 사랑 그와는 어떻게 만났을까? 부다페스트의 공연 마지막에 모든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 속에 있던 한젊은 헝가리인. 그는 타는 듯 한 시선, 키가 크고 균형 잡힌 몸, 자주 빛의 빛나는 고수머리 청년이었는데 첫 눈길 속에 야릇하고도 미친듯한 끌림으로 사랑의 불꽃을 피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춤보다는 연극배우로서의 자신을 돌보기를 우선시 하는 그의 내심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그와 치른 사랑의 달콤한 축제도 물리쳐야만 했다. 멀어져가는 사랑, 애절한 그리움사이로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탁월한 무대예술가 고든 크레이그였다. 그와는 어떻게 만났을까? 베를린에서 공연할 때 무대 맨 앞줄에 앉아있던 사람으로 위대한 여배우 엘렌 테러의 아들이었는데 그녀는 “첫날밤 그는 희고 부드럽고 빛나는 몸의 현란함으로 나를 눈부시게 했다. 나는 그의 속에서 나의 살, 나의 피를 만났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사도라를 상승시켜준 인물이었고, 그들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딸아이가 디드르였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랑도 춤을 떠나게 할 수 없었다. 양자택일에서 그녀는 춤을 선택했고 그는 떠났다.
그 자리에 회전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재력가 파리 싱어였다. 그가 베푸 는 사랑과 친절, 그로인한 경제적 풍요에다 새로운 빛으로 다가오는 그의 매력에 다시 가슴이 타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서로 간에 메울 수 없는 차이와 소통의 부재로 인해 행복감이 점차 퇴색하고 있었다. 그의 청혼도 그녀의 춤을 앞지를 수 없었다. 그와의 사이에 아들 패트릭이 태어났지만 훗날 교통사고로 딸디드로와 함께 사망하고 만다.
텅 빈 황무지와 같은 그녀에게 오는 또 하나의 인연, 18살 연하의 마지막 연인이며, 남편이 된 러시아출신의 천재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었다. 1922년 5월 러시아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를 만난 후 그녀는 한 번도 평화로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주벽이 심하고 공개적으로 그녀를 무시하고 멸시했으며, 때리거나 저속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관대함과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점점 도가지나치고 있었다. 결국 손목을 칼로 그은 후 피로 쓴 시를 남기고 난방 파이프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예세닌과의 결혼에 대해 “이 결혼은 내가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공연”이라며 결혼생활의 환멸을 나타내고 있다. “맨발의 님프”, “여신같은 성녀”,“춤의 여신”, “산들바람의 자매” 등으로 추앙받던 이사도라 덩컨.
그녀는 피같이 붉고 긴 스카프를 두르고 스포츠카를 타고 가다가 스카프 자락이 차바퀴에 깔리면서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1927년 9월 14일 오후 9시 30분 그녀의 나이 불과 49세였다. 이사도라의 유해는 그녀의 아이들과 멀지 않는 곳에 안치 되었다.
[2015년 10월 26일 제69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