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불러 본 천년의 사랑 <9>서동과 선화공주
마 캐는 총각과 공주의 사랑
겨울눈비가 잦은 요즘 따뜻한 풋 사랑에 대한 생각이라도 떠오른다면 그나마 지내기가 한층 수월할 것이다. 비가 오면 비가와서 반갑고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이 불어서 즐겁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일일까.
인간사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만고의 진리가 춥다고 웅크리는 좁아진 마음을 조금은 훈풍이 돌게 하는 것이 아닐까.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정사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유령의 공주이다. 그러나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역사에 단 한 줄 이름이라도남기지 못한 왕자와 공주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진평왕의 첫째 딸이 덕만공주, 둘째 딸이 천명공주 즉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라고『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화랑세기』에는 천명이 첫째 공주, 덕만이 둘째 공주로 전한다. 뒤에 덕만이 부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선덕여왕이 된다. 그러나 선화공주는『삼국사기』와『화랑세기』에는 그 모습이 없지만 일연스님의『삼국유사』에 다행히 살아남아 백제 무왕이 되는 서동과의 러브라인을 형성할 수가 있었다.
서동의 어머니는 익산 마룡지 옆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잉태한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즉 이물교혼(異物交婚)인 셈이다. 여기에 커다란 복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정말로 연못의 용과 관계를 하여 서동이 태어났다고 믿으면 초딩 수준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은 절대 권력을 상징하므로 연못의 용은 한 나라의 절대 권력인 왕을 상징한다고 하면 고딩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즉 백제왕의 숨겨진 왕자란 말이다. 우리 역사의 대다수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여 훌륭한 왕으로 칭송 받는 이들의 공통점은 고귀하게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수많은 고통 속에 자라난다는 것이다. 물론 고전 소설 속 주인공들도 하나 같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를 캐며 어머니와 살았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 천하절색이란 소문을 듣고 신라로 잠입하게 된다. 그러나 신분의 벽은 높기만 한 것. 나름의 궁리로 묘책을 짜보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배가 고픈 서동은 백제에 있을 때부터 익숙한 마를 캐서 한 망태기 둘러메고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마을 어귀에는 한 무리의 떠꺼머리총각들이 흥얼거리며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동요였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서동은 번쩍 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묘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급히 서동은 떠꺼머리총각들이 부르던 동요에 가락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어 그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물론 망태기에 들어있던 마를 나누어 주면서…그 노래를 불러보면
선화공주님은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主隱
남 몰래 시집가 놓고
他密只嫁良置古
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
薯童房乙
薯童房乙
밤에 알 안고 가다
夜矣卯乙抱遣去如
夜矣卯乙抱遣去如
구중궁궐 공주님이 남 몰래 시집가다니? 또한 마를 캐는 놈의 방을 그것도 밤에 알을 안고 가다니? 서동의 알이라면? 이 노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19금 스토리가 될 것이 뻔하다. 영문도 뜻도 모른 떠꺼머리들은 온 서라벌 저잣거리를 다니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들은 서라벌인들은 노래가사에 선화공주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궁궐관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사실『화랑세기』를 보면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대 신라의 풍속은 남녀가 자유로운 연애는 물론이고 여기에 한술더 떠서 남편이 있는 부인도 스스럼없이 다른 남자를 만나서 즐기는 것을 보면 입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역사 기록인 것을.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가설이 가능해질 수 있다. 신라 사회를 가장 적나라하게 가감 없이 표현한 서책이『화랑세기』라면, 유교적 고려의 가치관이 투영된 서책이『삼국사기』, 불교적 고려사회의 가치관이 녹아들어간 서책이『삼국유사』인 셈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보는 시각에 따라 이처럼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 ‘삼국사기’엔 없으나 ‘삼국유사’엔 기록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서동의 전략적 접근 절실한 사랑의 힘
다시 서동에게로 가보면, 결국 이 노래의 소문이 선화공주의 부왕인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 신라왕 중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말고는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정치력의 대가 진평왕이지만 그냥 덥고 갈 수는 없었다. 결국 진평왕은 간언을 유노하고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게 된다.
궁궐 창틈으로 이 소식에 들은 서동은 짐짓 모른 채 선화가 거쳐 갈 길에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윽고 공주의 행차가 지나가자 서동은 맨발로 뛰어나가 공주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공주의 귀양길 호종을 하겠다고 한다. 아이들 동요의 신기함에 그만 선화공주도 은근히 서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밤이 되자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둘은 손을 잡고 넘고 말았다. 물론 이때 잉태한 아이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게 낮이면 함께 웃고 밤이면 한 몸되기를 수일 째, 어느 날이었다. 공주는 서동에게 앞으로 살아갈 방편을 의논하고 싶어 모후인 마야부인이 준 황금 한 바구니를 서동에게 보여주면서 “이것만 있으면 우리 둘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서동은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요?” 이에 선화공주는 황금의 귀중함에 대하여 상세히 말해
주었다. 설명을 자세히 들은 서동은 “이 물건은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산더미 처럼 많소”하는 것이 아닌가.
주었다. 설명을 자세히 들은 서동은 “이 물건은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산더미 처럼 많소”하는 것이 아닌가.
장면을 바꾸어 선화공주는 이 많은 황금을 신라에 있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보내어자신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한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궁전으로 황금을 옮겨놓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진평왕은 항상 서동에게 편지로 안부를 묻고 이를 안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어 백제 30대 무왕에 등극하게 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서동을 아명이 신당인 원효대사로 보기도 하고, 또 신라와의 결혼동맹으로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한 백제 동성왕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이야 일단 제쳐두고 서동의 묘책은 배울 바가 많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서동의 모습에서 요즈음 언론에 오르내리는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벤처기업가들이오버랩 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일까.
[2013년 12월 23일 제47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