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3월 29일

노래로 불러본 천년의 사랑

지체 높은 여왕을 사랑한 역졸

 
 
<4>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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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입구에 사천왕사가 있다. 당간지주의 위용이 놀랍다.
<사진제공 신라문화동인회 박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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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을 시샘하던 여름 재촉비가 담장을 장미로 5월이 무르익었음을 화려하게 그려놓았다. 현관 앞 편지함엔 결혼청첩장이 여러 장씩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장미는 결혼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데코레이션인가 보다.
  
장미란 가까이서 보면 너무 화려하여 눈이 부신다. 오래 보다간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아마도 내면의 불타는 화려함을 참지 못하여, 일거에 용수철마냥 튀어 오르는 정열의 화신(火神)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천년황국 신라에도 불의 화신(化身)이 살아 있었다. 때는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시절이었다. 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이 53년 간 왕위에 있었으니 만약 맏딸이라면 장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다른 기록에 둘째딸이라고 하나 그래도 부왕의 재위기간을 보면 상당한 나이에 왕좌에 등극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신라 개국 후 첫 여왕이다 보니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들조차도 그의 정치력에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덕여왕은 자주 병고에 시달리는 왕으로 전한다. 동왕 5년 3월에 “왕이 병들었는데 의약과 기도도 효력이 없었다.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승려들을 모아 놓고 인왕경을 강독하게 하였고, 승려 백 명 가량을 허락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재위기간 동안 그렇게 건강하지는 않은 듯 여겨진다.
 
이태 전부터 봄이면 우리 한반도엔 귀객(鬼客)이 하늘을 뒤덮는다. 바로 황사다. 중국 내륙 사막에서 시작하여 봄만 되면 우리를 괴롭히는 반갑지 않은 존재인 것만은 사실이다. 황사는 중국 내륙의 사막화로 인한 결과로 우린 알고 있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선덕여왕 7년 9월 기록에 “하늘에서 노란 꽃비가 쏟아졌다.”라는 것이 보인다. 하늘에서 쏟아진 노란 꽃비는 황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문이 듣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기 7세기 초반에 벌써 중국 내륙의 사막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된다.
 
이 기록보다 앞서 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49년 3월에 “큰바람이 불고 흙비가 5일동안이나 왔다.”고 한다. 이 역시 황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런지. 또한 여왕 8년 7월에 “동해물이 붉고 뜨거워 어별(魚鼈)이 죽었다.”란 기록이 보인다. 수산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견강부회(牽强附會)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그래도 필자의 뇌리엔 적조현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왜 일까? 혹『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여왕을 옹립한 신라를 비판하려는 전주곡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덕여왕은 당제(唐帝)로부터도 심한 비아냥을 듣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도움을 요청하러 당에 간 신라 사신에게 당제는 “그대 나라는 임금이 부인(婦人)이어서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한 적이 없다. 내가 나의 친족 한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고, 자연 혼자서 갈 수는 없으므로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보호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함을 기다려 그대의 자수(自守)에 맡기려 하니 이것이 셋째의 방책이다.”라며 신라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면서 여왕을 유린하고 있다.
 
여자로 왕위에 올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는 등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는데 혼신을 쏟고, 나름 당대의 국제 정세에 발 빠르게 대응한 선덕여왕으로써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안으로는 비담세력으로부터 반발에 직면하고, 당시 대국이라는 당으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몸인들 제대로 유지되었을까.
 
여기에『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마저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다행이다 할 것이다.”라고 돌 직구(?)를 날렸으니, 여왕은 사후에도 편안치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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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릉. 적송들이 경배하는 듯 모두 왕릉으로 굽어져 있다.
<사진제공 신라문화동인회 박보정>
 
이렇듯 내우외환에 시달린 여왕이지만 그를 사무치게 사모한 사람이 서라벌에 있었으니 그는 활리역 사람 지귀(志鬼)였다. 매일 여왕을 보고픈 마음에 온 서라벌이 떠나가도록 자신의 마음을 외치며 나다니고 있었다. 이런 못난 엉덩이에 뿔난 지귀를 관리들은 타일러도 보고 심한 매질도 해 보았지만 지귀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서라벌인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말았다. 이 소문이 서라벌 저자거리를 타고 구중궁궐 여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일개초택의 무지랭이 놈이 지존의 여왕을 사모한다고 떠벌였으니 지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관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여왕은 화를 내기는커녕 영묘사 佛공양 행차에 그를 데려오라고 말한다. 깜짝 놀란 관리들은 당장 지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않으면서 여왕의 행차를 왕방울 소방울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여왕의 영묘사 거동 행렬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귀는 행렬 뒤를 따르면서 마음은 벌써 자신을 받아 준 여왕의 가슴에 들어가 있었고, 그의 마음엔 태산준령 같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영묘사에 도착한 지귀는 탑 아래에서 여왕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 듯 눈을 뜬 지귀는 자신의 가슴위에 여왕의 팔찌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여왕의 행렬을 뒤따랐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여왕은 궁궐로 돌아가고 난 뒤였던것이었다. 얼마나 여왕과의 만남을 기다렸던가. 식음을 전폐하고 손꼽았던 오늘인데 만나지 못하다니. 심장을 도려내는 듯 안타까움에 지귀의 마음에는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음에서 시작된 불길은 광염의 신이 되어 자신을 태우고 영묘사 탑을 태우고 말았다.
 
이렇게 마음을 불살랐던 일이 있은 후부터 지귀는 서라벌의 불귀신이 되어 온 신라 땅을 떠돌며 아직도 이미 타버린 마음의 불씨를 새기고 있었다. 이때 서라벌 사람들은 이 지귀의 화신(火神)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고 있었다.
 
이를 본 여왕은 자신으로 인해 불귀신이 된 지귀의 영혼을 달래어 백성을 위무코자, 불귀신을 쫓는 주문(呪文)을 지어 백성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지귀주사(志鬼呪詞)>는 다음과 같다.
 
志鬼心中火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燒身變火神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流移滄海外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不見不相親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지체 높은 지존의 여왕을 사랑한 지귀는 더 이상 불의 화신이 아닌 영원히 여왕의 사랑을 받는 한 사람의 남자로 천계에서 여왕을 보위하였을 것이다. 비록 살아서는 만나지 못한 사모했던 여왕이었지만 죽어서는 한 단계 승화된 사랑으로 여왕 곁을지킨 것이다.
 
이 이야기는『수이전』에 기록되어 전하다가『수이전』이 유실됨에 따라 조선시대 권문해의 백과서전 격인『대동운부군옥』에 기록되어 전한다. 또,『 삼국유사』의해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영묘사(靈廟寺) 화재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야기 전부를 들을 수는 없다.
 
다만 탑만 타고 나머지 사찰의 전각은 화재를 모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어사(吾魚寺) 연기설화의 주인공 혜공이 미리 짚으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에 가서 금당 및 좌우의 경루와 남문의 행랑채를 둘러치라고 일러 준데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2013년 5월27일 제4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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