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11월 21일

노래로 불러본 천년의 사랑

아제비와의 사랑 가당키나 했을까

 
<3> 미실과 사다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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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는가? 봄은 갔는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온통 꽃바다가 어느 새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가 되었다. 산과 들로 나가면 보이는 것은 푸름뿐이요. 수액 오르는 소리가 올챙이 물장구와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그녀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그녀는 천 수백 년 동안 잊혀 있었던 인물이다. 아니 잊으려고 수많은 역사상 학자나 고위관료들이 노력한 결과로 왜곡에 성공한 사례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마냥 참고만 있지는 않는가 보다. 그것은 1989년 우리에게 홀연히 찾아온『화랑세기』가 진실을 가지고 천년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철의 여인을 능가하는 미실이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우리는 전율을 넘어 그 어떤 두려움마저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왜 우리의 역사는 그녀에게 냉혹하리만치 가혹하였던가? 이제 그 해답을 찾으러나서야 할 때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치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이지 않는가.
 
일주일 전 지구촌은 철의 여성을 잃었다고 야단이 법석이었다. 물론 그녀에 대한 평가는 양분된 채 조용히 뉴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녀는 나은 편에 속한다. 향후 역사가 그녀를 재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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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년 신라의 미실이는 이와는 매우 다르다. 그녀는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단 한 줄도 역사가들은 할애하지 않았다. 정사인『삼국사기』도 야사인『삼국유사』도 하얗게 그녀의 이름조차 지워버렸다. 이것은 남성중심주의에 유교적 사관을가진 역사가들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붙여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실은 2세 풍월주를 지낸 미진부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1세 풍월주를 지낸 위화랑의 딸인 옥진이 박영실과 결혼해 낳은 묘도이다. 법흥대왕의 후궁인 묘도는 미진부와 사통으로 미실과 미생을 낳았다.
 
이런 가문에서 자란 미실은 타고난 미색과 정치력으로 신라 황실을 쥐락펴락하였다. 그녀가 섬긴 왕은 신라 24대 진흥왕,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 금륜태자(후일 25대 진지왕) 그리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즉 26대 진평왕까지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존재한 나라가 아니다. 천 수백 년 전 한반도에 실존한 왕국이다. 현재의 잣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우리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신라의 모습을 기존 역사서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기존 역사서는 신라가 망하고 수백 년이 지난 후 편찬된 것이다. 특히 신라 사람이 아닌 고려시대 역사가들이 당대의 가치관을 투영하여 집필된 것이다. 온전한 신라의 모습일 수는없지 않는가.
 
미실이는 삼조(진흥, 진지, 진평)를 품안에 품고서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남편인 세종(6세 풍월주), 당숙뻘인 사다함(5세 풍월주), 그리고 사다함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 설원랑(7세 풍월주)까지도 자신의 치맛자락에 좌지우지 하였다. 가능한 일일까?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는 22세 풍월주 양도공의 어머니 양명공주의 말에 그답이 있을 것 같다. 신국을 표방한 신라를 중국의 예로 말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리라.
이런 권력과 신라의 화랑 중의 화랑들인 풍월주들은 마음대로 주무른 미실에게도슬픈 사랑이 있었다. 아무리 구중궁궐이 좋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초막에서 오순도순 지내는 것 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바로 사다함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미실과 사다함은 서로 불꽃같은 사랑을하면서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때는 진흥왕 시절이었다.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부가 출정하였다. 이에 사다함도 초개같이 나라를 위하여 전쟁터로 달려 나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미실은 울며불며 사다함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않았다. 그러나 화랑 풍월주인 사다함이 마냥 머뭇거릴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사다함은 온갖 방법으로 미실이를 위로하였다. 미실이는 애끓는 심정으로 사다함의 무사 귀환을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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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風只吹留如久爲都 郞前希吹莫遣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浪只打□如久爲都 郎前□打莫遣
빨리 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早早歸良來良 更逢叱那抱遣見遣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此好 郎耶 執音乎手乙 忍麽等尸理良奴
 
미실이의 배웅을 받으며 대가야로 출정하는 사다함은 어서 빨리 돌아와서 미실이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다함은 적토마를 타고 대가야 전단문으로 돌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래서 대가야 왕 도설지를 비롯하여 오천명의 포로를 이끌고 신라로 개선하게 되었다. 그는 신라 황실의 개선 행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사랑하는 연인 미실이를 만나야겠다는 마음에 발걸음은 줄달음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나, 미실이는 이미 진흥왕의 동생인 세종에게 시집을 가고 난 후였다. 사다함은 땅을 치고 통곡하며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심중을 나타내는 노래가 한역되어 전하고 있다. 바로이 노래가〈청조가〉이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靑鳥靑鳥 彼雲上之靑鳥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 무는가
 胡爲乎 止我豆之田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靑鳥靑鳥 乃我豆田靑鳥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胡爲乎 更飛入雲上去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旣來不須去 又去爲何來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空令人淚雨 腸爛瘦死盡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吾死爲何鬼 吾死爲神兵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되어
 飛入<殿主護> 護神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朝朝暮暮 保護殿君夫妻
만년 천년 오래 죽지않게하리
 萬年千年 不長滅
 
노래를 마친 사다함은 7일간 시름하다가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미실이도 천주사에서 사다함을 명복을 빌면서 꿈길에서라도 보기를 부처님께 갈망하였는데, 과연 그 날 밤 미실이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너와 내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하는 것이 아닌가. 미실이는 반가운 마음에 그만 사다함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렸던 일인가? 미실과 사다함은 한 몸이 되어 그렇게 오래도록 운우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과연 미실이와 같은 사람이 실존하였을까? 해답은 우리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역사관에 남성중심주의와 유교적 사관을 재거할 수 있다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그날을 기다려 본다.-계속-
 
[2013년 4월25일 제4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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