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수가 나쁘고 신선한 채소를 자주 섭취할 수 없는 티베트, 몽골등 사막이
나 고원지대를 이도하는 유목민에게 차는 생필품이나 다름없었다.
아라비아와 교역이 활발했던 중국의 당.송나라 양 대에, 수 개월을 항행하던 아라비아 선원들은 괴혈병에 자주 걸리던 반면 중국 선원들은 거의 무사했다고 한다.
이는 항상 먼 길을 떠날 때 비타민 C가 풍부한 차를 반드시 챙겨 떠났던 중국인들의 습관 덕분일테다.
일찍부터 차의 중요성을 깨닫고 생활화했던 중국인들은 차로 인해 영국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일대 전환점 , ‘아편전쟁(1840)’으로 이어졌다.
중국차를 대량 수입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차, 도자기 등의 수입으로 은이 대량유출되고 재정이 위태로워지자 이를만회하기 위해 슬그머니 아편을 중국으로 밀매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편으로 중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청나라는 영국의 아편을 몰수,소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곧 전쟁의 빌미가 되고, 결국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자국 영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는 수모까지 겪게 된다.비록 받아들인 시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홍차의 나라’로 알려진 영국의 차문화는 훌륭한 차문화를 꽃피우는 데 일조를 하였다.
영국인들은 차를 마시는 시간과 잎의 색으로도 다양한 차의 종류를 만들었는데, 인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던 배 속에서 녹차가 발효되어 변한 홍차,
‘블랙티(Black Tea)'와 오후에 마시는‘애프터눈-티(Afternoon Tea)'의 유래를 간직할 만큼,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매일 5~6잔의 홍차를 즐겨 마시며 차문화를 즐기고 있다.
1773년 12월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신대륙의 개척자들은 차에 부과되는 세금에 반발해서‘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ARTY)'을 일으키는 데, 이는 얼마 후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이후에도 차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는데, 먹기 좋고 간편한
‘티백(tea bag)'을 고안했고, 1904년‘아이스티(Ice Tea)’를 처음 만들었으며, 차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tea clipper(고속범선)’이 처음 만들어진것도 미국에서였다.
‘티백(tea bag)'을 고안했고, 1904년‘아이스티(Ice Tea)’를 처음 만들었으며, 차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tea clipper(고속범선)’이 처음 만들어진것도 미국에서였다.
러시아에는 17세기 중국에서 차가 전래되었는데, 영국과 달리 중국과는 바다가 아닌 육지로 이어져 있으므로, 배 대신 수백 마리의 낙타 떼를 모는 캐러반이 차를 운반했다.
추운 나라 러시아에는 차가 냉기를 달래주는 이상적인 음료였다.러시아 차문화의 상징인‘ 사모바르(samovar)’는 티베트 지방의 찻주전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신체와 방안을 데우는 난방 역할을 할뿐 아니라 실내 건조를 막는‘ 가습기’ 역할까지 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주체로서 일찍이 차문화가 활성화되었던 일본도 전국시대 혼란기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차도’는 그들의 강력한 통치수단의 하나이자 문화적 장치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화를 약탈해간 일본이 우리의 차와 도공 등을 무작위 약탈해갔던 것도 그들이 얼마나 차에 집착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일본의 도자문화와 차문화의
발전은 조선이 배경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이와 같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오랫동안 차를 마셔왔으며, 차를 얻기 위한 전쟁까지 불사하며 특징적인 민족의 문화를 꽃피우는 데 차를 이용해 왔다.
차가 세계 각 나라의 정신문화를 나타내고,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 존재하는 기호음료로 일찍부터 알려져 왔음이 자연스럽게 입증되고 있다.
고요한 밤, 비파음 같은 찬바람이 긴장한 자연의 속살을 흔들어 깨울 때, 그윽한 차향을 음미해보는 건 어떨까. 하얀 달빛만큼이나 청아한 고요가 내안에 넘치리니.
[2010년 1월 13일 제3호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