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20일

김문길의 역사이야기

신(神)이된 우리 곡물과 농기구

김문길 부산외국어대교수의 '일본속의 한국문화'
<3> 임란때 빼앗긴 우리 문화재
 
 
조선 볍씨와 탈곡정미기
 
 
 
 임진·정유재란을 통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나라 문화인이나 문화재유물을 마구 약탈해갔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문화전쟁’ 또는 ’조선 문화약탈전’ 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필자는 일본역사와 문화를 수년간 연구하면서 학회 때나 일본역사학자들을 만날 때마다 ‘임진왜란’ 이 잘못된 용어이고 임진왜란은 문화약탈전쟁이니 용어를 어서 바꿔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때마다 모두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문화약탈전쟁

 임진왜란이란 임진년에 왜병들이 느닷없이 쳐들어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전쟁을 통해 적의 땅을 빼앗으면 적군의 인민은 노예가 되는 것이고 재산은 자연 승전국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병들은 조선의 성을 침략 할때마다 문화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가려고 했고 문화재를 하나라도 더 약탈해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는 전쟁의 와중에도 주인장(朱印狀)을 보내 조선 문화인, 조선문화재급 유물을 약탈해 오라고 지시했으니 문화약탈전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예로서 임진·정유재란 때 전라도에서 전쟁을 했던 왜장 로쿠스케(六介)의 고문서에 보면 우키카 히데이에의 진군에 가담한 로쿠스케는 전쟁시 조선 한의약 기술을 배웠는데 귀국할 때 한의사를 체포해 가고 한의료기구를 대량으로 약탈해 가서 중세 일본 사회에 신의학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 가가토에서 출병한 신헤이에(新兵衛)라는 왜장은 전쟁 중에 일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소위 신농기구라고 하는 탈곡정미기계를 가져갔다.

 그러나 왜병들은 조선의 성을 침략 할때마다 문화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가려고 했고 문화재를 하나라도 더 약탈해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는 전쟁의 와중에도 주인장(朱印狀)을 보내 조선 문화인, 조선문화재급 유물을 약탈해 오라고 지시했으니 문화약탈전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예로서 임진·정유재란 때 전라도에서 전쟁을 했던 왜장 로쿠스케(六介)의 고문서에 보면 우키카 히데이에의 진군에 가담한 로쿠스케는 전쟁시 조선 한의약 기술을 배웠는데 귀국할 때 한의사를 체포해 가고 한의료기구를 대량으로 약탈해 가서 중세 일본 사회에 신의학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 가가토에서 출병한 신헤이에(新兵衛)라는 왜장은 전쟁 중에 일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소위 신농기구라고 하는 탈곡정미기계를 가져갔다.

탈곡정미기 약탈
 
 탈곡 정미기는 찱흙으로 원통 2개를 만들고 상하 원통사이에 떡갈나무로 만든 톱니를 넣어 맞물려 돌아도록 제작해 원통에 벼를 넣어 두 사람이 돌리면 벼 껍질과 알곡이 분리되어 나오도록 되어 있다. 이 탈곡 정미기는 높이 1.5m 둘레 1m 정도의 크기로 한번에 벼를 약 두말정도 넣을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했던 탈곡정미기는 소형기계와 대형기계가 있었는데 대형은 크기가 배 이상 되어 소의힘으로 기계를 돌렸다. 아마 왜장 신헤이에가 약탈해 간 것은 소형인 것 같다. 약탈해간 탈곡정미기는 조선에서 가져왔다 해서 도우스(唐白)라 이름 붙인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인을 고려인이라 했고 문서상으로는 조선인을 지칭할 때 당인(唐人)으로 표기했다.
 
일본문화재 된 탈곡정미기
 
 탈곡정미기는 오늘날 오카야마 현 비젠 시(岡山縣 備前市)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에서 출간한『 세계대백과 사전』에 보면 임진왜란 시 일본은 탈곡정미기가 없었고 언제 조선에서 들어왔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도쿠가와 막부 때는 일본 신 농기구로 호평을 받아 농업문화에서 큰위치를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각 지방에서 오카야마 현 비젠시 박물관에 도우스를 견학하러 사람들이 많이 오고 있다.

아키바리원조는 우리 볍씨
 
 이뿐인가. 탈곡기를 약탈해갈 때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볍씨도 함께 가져갔는데 품질이 좋고 수확률이 높고 맛이 독특한 볍씨였다. 오늘날까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재배하고 있고 세계에 널리 알려진 아키바리(赤米)가 바로 그것인데 원래 우리나라 볍씨였다.

 임진왜란 때 왜장들은 작전지역에 별칭을 사용했는데 전라도를 적국(赤國)이라 하고 경상도를 청국(靑國), 경기도를 백국(白國)이라 하는 등 조선 팔도를 각 각 다른 호칭으로 불렀다.

 왜장 신헤이에는 전라도 곡창지에서 품질 좋은 볍씨를 훔쳐갔는데 적국(赤國)에서 가져왔다고 해서 적미(赤米) 즉 일본말로 아카바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카바리는 신품종으로 소득 증대에 큰 역할을 하고 에도 막부때에는 농업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일본 통치하에서 총독부가 우리 농민들에게 강제로 아키바리를 재배하게 하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신헤이에 왜장은 신농기구인 조선 탈곡정미기와 우리나라 볍씨를 전리품으로 가져가 자기 마을 고쿠시 신사(國司神社) 신전에 바치고 볍씨는 자기 마을에서 재배하니 소득량이 높고 품질이 뛰어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볍씨가 되었고 오늘날 일본에서나 세계에서 이름 있는 아끼바리는 원래 우리의 볍씨이다.
 
시모쓰키 마쓰리의 유대
 
 일약 유명해진 신헤이에는 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볍씨로 농사를 지은 맏물을 역시 약탈해간 탈곡정미기로 탈곡해 그 쌀로 떡을 만들고 감주를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그것이 시모쓰키 마쓰리(霜月祭)이다. 오늘날에도 소쟈(總社)시 신본(新本)의 고쿠시 신사에서는 매년 1월15일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아키바리 쌀과 역시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가 탈곡기 도우스로 탈곡해 떡을 만들고 우리나라에서 배워간 감주를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또 동네 사람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400여 년 전 신헤이에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일본 열도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나라 볍씨 아키바리는 일본 벼농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농민들도 아직 아키바리 볍씨를 재배하는 곳도 있다.

(계속)

[2010년 1월 13일 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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