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명치(明治) 정부는 지명조사
명치유신이 일어난 후 일본은 그야말로 천지가 바뀌어졌다.
지명도 번(藩)에서 현(縣)으로 바꾸고 사람들의 정신 구조뿐만 아니라사회 문화 전반을 바꾸었다.
그 때 외무부와태정관(太正官)은 그때 지명조사과에서 조선해에 가까운 울릉도, 독도(죽도, 송도)는 조선의 부속섬이라고 보고했다.보고문을 번역해 보면 “송도는 사람이 살지 않고 죽도는 원록년부터 당분간 조선인들이 거주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대나무, 인삼 자연 해산물이 풍부함을 들었다.”라고 보고했다.
이문서는「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였고 1930년 『일본 외교문서』 제 3권에 수록된 것이다. 명치 새 정부에서도 울릉도, 독도는 조선 영토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5. 1905년 러일전쟁때 독도 침탈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5월 28일까지 있었다. 러시아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는 동해 바다 울릉도, 독도 사이에서 있었다.
이런 격전지에 독도는 일본군에게는 필요한 군사 요새지였다. 그래서 1905년 2월에 관료회의를 열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하자는 결의를 했다. 바로 1905년 2월 21일자로 관보로 독도를 빼앗아 갔다.
관보를 우리말로 번역 해보면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울릉도에서 서부 85리에 있는 도서를 죽도라 칭하고 지금으로부터 자국(自國) 오끼섬주의 소관으로 하고 이 문서를 관내에 공시하기를 훈령함.” -명치 38년 2월 21일 내무대신 요시카와 아카마사 시마네 현 지사 마쓰나가 다케요시 이와 같이 명치 38년 2월 21일자로 내무대신이 시마네 현 장에게 내린 문서이다.
이 문서가 남의 땅 독도를 죽도로 하고 일본 영토로 빼앗아 간 문서이다. 이 문서를 받고 명치 38년 2월 22일자로 시마네 현장이 관내에 공시하여 일본 영토로 정식 인정했다.
4. 일본사람들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하는 이유
일본인은 독도를 죽도라 하고 자국의 영토라고 하는 이유 중에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
첫째, 1696년 막부가 해금령이 내렸다. 그때 독도, 즉 죽도는 해금령이 내리지 않았고 계속 일본영토로 소유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러일전쟁시 즉 1905년 관보로 세계만국에 공포하였다는 것이다. 세번째 독도는 일본해에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국제법상 영토등록은 물이 나고 사람이 살아야 인정을 받을 수가 있고 소속한 바다 내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1696년 정월에 내려진 해금령에 죽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무로까와의 주장처럼 도해령이 내려질 때나 금지령이 내려질 때 독도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1905년 관보가 내려질 때 조선은 이미 주권이 빼앗기고 일본인이 일방적으로 빼앗아 갔다.
세 번째, 가장 큰 문제는 필자가 주장했던바와 같이 독도는 동해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해에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2005년 11월 독도연대 초청강연 ‘동해를조선해로 해야 한다’.)
그러니 독도를 동해를 조선해로 해야 한다.
(5월29일 경북일보 등, 필자 칼럼 참조)
그러니 독도를 동해를 조선해로 해야 한다.
(5월29일 경북일보 등, 필자 칼럼 참조)
4. 결론
안용복의 업적은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다 찾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지금 까지 찾은 것만 해도 안용복의 업적은 말할 것 없이 크다. 왜냐하면 안용복과 박어둔 외 울산사람 11인은 울릉도 독도 찾는데 큰 인물이었다. 만약에 이들이 없었더라면 울릉도 독도에 허가를 내어 고기를 잡고 그곳에서 살았으니 지금까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대마도는 모든 문헌에도 신라 땅으로 되어 있지만은 일본 무가(武家)정치가 대두되어 대마도를 슬그머니 점유한 것이 오늘날까지 대마도가 일본땅으로 되어있는 것 이다. 그러니 안용복 외 일행이 없었더라면 울릉도도 일본 땅이 되었다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금후 안용복의 업적 자료는 수개월에만 그칠 것 이 아니라 이번 연구결과로서 안용복 생가를 어디에 짓는 간에 꼭 지을 필요성이 있고 앞으로 안용복의 연구를 폭넓게 하여 한일 관계사를 (특히 조선통신사 관련) 연구할필요성이 있음을 이번 연구조사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다. <끝>
[2010년 12월 16일 14호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