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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의 역사이야기

“독도는 우리땅” 막부에서도 당당

 
 
 
 안용복장군(이하 장군 생략)은 수영성에 근무했던 병사였다. 수영성 병사는 바다를 지키는 해군이었다. 안용복은 순흥 안 씨로 일본어가 능숙한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지는 부산 좌천1동 14통 3반 이다. 좌천동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왜관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자주 접하다보니 일본어가 능숙한 것으로 짐작된다.
 
 안용복은 수영성에 사람이고 부산 좌천동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가진 요패에 기록된 주소이고 그는 키가 4척 1촌이라 했으니 옛 사람 표준 키에 비해 작은 편이였다. 그는 얼굴이 검고 마마 자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시 병을 앓은 것으로 안다.
 
① 안용복의 도일
 먼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다. 울릉도와 독도에 있는 일본인들이 자기 영토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던 까닭은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조정에서 공도(空島)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때에 일본인들은 마음을 놓고 자기 영토라 여기고 울릉도에 산 것이다. 그러니 부속섬인 독도도자기 영토라고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수영성 병사였던 안용복이 일본인들이 사는 울릉도에 가서 그들을 쫓아내고 어선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킨 것이다.

 1693년 4월18일 이날은 유별나게 일본인들이 많이 와서 고기를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박어둔(朴於屯) 10여 명의 인원을 데리고 울릉도에 들어갔다. 이미 7척이나 되는 어선들이 들어와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용기백배로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과 싸움 끝에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간곳이 오끼도주(隱岐島主)집이었다. 안용복 일행의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본 오끼도주는 다시 상급자인 시마네지방 돗토리 지방인 호키카미(伯者守)집으로 보냈다. 오끼도주는 지금의 오끼섬의 장(隱岐島長)이다. 그리고 호기카미는 지금으로 생각하면 시마네현 지사(島根縣長)이다. 호기카미는 당시 마쓰다이라신따로(松平新太郞)였다.
 
 마쓰다이라는 다시 도쿠카와 막부(德川幕府)에 안용복 일행을 보냈다. 막부까지 보내진 안용복 일행은 담판을 벌였다. 그 후 돗토리(당시 요나고:米子) 지방에서 출항하여 울릉도 독도에서 고기 잡는 어선 회사 오오야 집에서 안용복은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첫날을 아주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막부에 가서 서계라도 받아가야 되겠다고 강력히 주장하니 오오야는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고 감금시킨 상태였다.
 
 ‘1693년 4월 18일 안용복 박어둔은 울릉도에서 납치되어 먼저 도착한 곳은 다시 말해서 오끼섬(隱岐島)이었다.

오끼섬에서 다시 요나고(돗토리현)로 갔다. 요나고에 간 이유는 당시 번주가 요나고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나고에 도착해서 지냈다는 문헌은 돗토리번의 일지(日誌) 히까이쵸(控帳)에 있다. 히까이쵸에는 안용복 일행이 도착한 시기 머물렀던곳 일거행동이 기록되어있다. 히까이쵸를 보고 19세기 초에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島正義)는「 죽도고」를 썼다. 히까이쵸는 죽도고의 원본이라 할수있다.(추후 내용을 더 검토해야 한다.)

 1693년 4월 18일 도착한 안용복은 6월1일 돗토리에 있는 정희소에 숙박하면서 영토문제를 두고 실란하게 거론하면서 논쟁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안용복은 “울릉도, 독도는 조선 땅이니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고기잡이 했는데 무슨 이유로 잡아왔느냐!” 라며 호통을 쳤고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 독도에 못 오도록 각서 (서계)를 써달라고 했다. 도쿠가와는 항의하는 안용복의 말을 듣고 울릉도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각서를 써 주었고 안용복 일행은 그것을 받아들고 귀향길에 올랐다.

 당시 귀국 길목은 대마도를 거쳐 오는 길이었다. 안용복일행이 대마도까지 와서 하루를 유숙할 때에 괴한들이 들어와서 목에 칼을 대고 막부에서 받은 서계를 내놓으라고 했다. 할 수없이 서계는 빼앗기고 말았다. (계속)
 
 
[2010년 8월 31일 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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