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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의 역사이야기

신라범종이 일본의 국보?

 
김문길 부산외국어대교수의 '일본속의 한국문화' <1>
 
 

 
임진왜란 때 빼앗긴 우리 문화재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은 남달리 사찰에 걸려 있는 종을 좋아했는가 보다. 그가 읊은 시 가운데 ‘마음을 맑게 하고 풍속을 깨우치고 음향을 조화시키며 원기를 통달케 하노라’ 하는 범종(梵鐘)에 관한 시가 있다.
 
신라시대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그 신비한 주조 술로 은은한 소리의 여운과 아름다운 조각미를 풍기는 세계 어느 나라 범종보다 뛰어난 명종을 제작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범종은 불가에서는 일종의 악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불에 사용하는 사물(四物) 즉 범종, 운판, 법고, 목어 중에서 제일은 범종이라 한다. 이 범종의 소리는 인간을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소리이다.   
 
이렇듯 범종이 예불에서 사용하는 이름 있는 악기였던 점과 세계적인 금속공예품인 것을 알았던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 오타니 요시카타(大谷吉 隆)는 통일신라 때 제작된 범종을 훔쳐가 자기가 살던 오카사(若狭) 성내에 이 있는 상궁신사(常宮神社)에 두었다.
 
요전에 신라범종 연구차 방문했을 때는 국보수장고(國寶收藏庫)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간누시(신주(神主)에 의하면 ‘신라범종은 일본 국보문화재이므로 훼손될 염려가 커서 보관소를 만들었고 10여년 전만 해도 누구나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1년에 한번씩 개관할 때 만 볼 수 있다“고 했다.
 
신라범종에 대한 유래는 『상궁신사소지常宮神社小誌』에 보면 “게이초(慶長)2년(1597년) 2월 29일 와카사 성주 오타니 요시타카가 조선 전쟁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진주에서 범종 1구를 가져와서 봉납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높이 115.5cm, 구경(口徑)66.7cm의 동종(銅鐘)이다. 제작연대는 태화(太和)7년 신라 흥덕왕 7년(833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범종의 명문(銘文)중에는 “삼충사지 행도사지 성사 (三忠舍知 行道舍知 成士)”라는 글이 있으니 삼충사지와 행도사지는 신라 관위명이고 제작자는 성박사, 즉 성씨인 것으로 사료된다.
 
높이 115.5cm, 구경(口徑)66.7cm의 동종(銅鐘)이다. 제작연대는 태화(太和)7년 신라 흥덕왕 7년(833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범종의 명문(銘文)중에는 “삼충사지 행도사지 성사 (三忠舍知 行道舍知 成士)”라는 글이 있으니 삼충사지와 행도사지는 신라 관위명이고 제작자는 성박사, 즉 성씨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범종 안내문에는 “원래 신라범종은 조선 청주(淸州)연지사(蓮池寺)에 있던 것을 입수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궁 신사의 역사지인 『상궁신사소지』에는 조선 진주 연지사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진주에 연지사라는 절이 있는가 하고 수차례 진주를 찾았으나 그러한 사찰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범종은 용통(甬筒)이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용뉴는 수직으로 향하여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을 종정(鐘頂)에 붙이고 종신 하단에는 비천상(飛天像)이 피리를 불면서 평화스럽게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종신 하단에는 같은 크기의 방곽(方廓)을 구획하여 그 내부에 파도무늬를 조밀하게 새겨 두른 해파문(海波文)이 장식되어 있다.
 
  신라범종을 와카사 성주인 오타니 요사타카가 일본으로 가져가 자가가 사는 성내에 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시에 제작된 범종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수직으로 힘 있게 내려오는 광경이나 또는 비천상이 피리를 불명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호국불교사상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왜장 오타니 요시타카는 임진왜란 시 일본군대가 장렬히 싸워 승리했다는 기쁨과 일본국력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의미로 신라범종을 빼앗아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범종에는 숨은 이야기가 많다. 범종을 가져간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와 강화조약이 시도될 무렵 일시적으로 왜군이 철수할 때이다.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군은 군사를 증원시켜 재침략하였는데 이때 오타니 요시타카는 와카사 성내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출전식을 올리면서 신라범종을 타종하며 승전가를 외쳤다고 한다.
 
신라범종은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서 1900년 국보급 문화재를 조사할 때 국보1등급으로 지정되었고 메이지 천황은 어닐 태자가 병에 걸렸을 때 이 신라범종을 참배함으로써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정국이 안정된 1952년 10월 또다시 일본문화재 조사국에서 신라범종을 신 국보특급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궁신사의 신라범종은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유명한 정치인이나 문예가들이 즐겨 관람했다.
 
그중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자주 이 신사를 찾았는데 그의 유명한 단가(短歌)에는 “중추 대 보름날밤 쓰루가에 묵으니 뜻밖에 비가 내려 가을 달은 간 곳 없고 종소리만 은은히 파도와 같이 들리네”라고 신라범종을 노래하였다.
 
지금도 상궁신사에는 일년에 한번씩 개방하는 신라범종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선조들이 제작한 범종은 인간의 번뇌를 씻어주는 마음의 고향이며 원천이자 조상의 슬기로운 주조기술과 선조들의 얼이 담긴 것이다. 그 신라범종이 이국땅에 그것도 임진왜란 때 일본 왜장들이 빼앗아간 일본국보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리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범종은 모두 6개뿐이다. 그 중 5개가 모두 일본에 있으니 나머지 4개도 일본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범종과 함께 반활 될 수 있도록 운동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필자는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중 지난 “왜군에 빼앗긴 연지사 종 찾자”(조선일보 2009.1.19) 라는 국민 행동창립 총회가 조직되었다 하니 기쁨을 감출 수 가 없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경주 에밀레종만 유일하게 경주를 지키며 에밀레의 애틋한 마음을 되새기게 해 주고 있다.
 
 
[2009년 11월 23일(월요일) 창간호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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