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내 아기를 돌보아주는 돌보미 아주머니는 이모라야 한다. 이모래야 이모의 조카가 되는 내 아기에게 잘 해주리라는 믿음이 선다.
인도에 살 때 우리집 가정부 -지금은 사라진 나라 인도 북부의 시킴 왕국출신- 칼라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아는 여자들은 거의 모두 그녀의 sister, 그녀가 아는 남자들은 거의 그녀의 brother 라고 불렀다.
중동에서도 여차하면 brother 형제, 형제 나라를 강조한다. 알라신을 믿는 나라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끈끈해야 한다. 전통사회일수록 형제의 이익은 곧 나의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끈끈한 관계유지가 관건이다.
학연 인연 동향에 늘 신경을 써서 마당발이 되야 하는 한국 남자의 운명과 비슷하다. 한국에서 유교적 전통사회와 시장민주경제가 공존하기는 쉽지 않다. 시장민주경제를 지향하는 현대의 우리사회에는 서구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의 깔끔한 관계가 필요하다.
이모, 고모, 형님, 아우 해서는 곤란해진다. 따지기 좋아하는 민주주의에서 두루뭉술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남이가’에서 보듯 우리 가까운 사람에게 법을 어기게 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 이모, 형님, 아우라면서 ‘우리가 남이가’ 식의 선을 그으면 곤란하다. 박근혜 대통령을 이모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도마에 올랐다. 가까운 듯 멀고, 멀고도 가까운 맑은 인간관계는 민주사회의 기본이며 이는 호칭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두루뭉술 이모와 조카관계 보다는 여자도 이름을 불러주는 한국사회가 돼야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질듯하다. 나의 어머니세대는 훨 심해서 나는 그분들의 처녀적 동네이름을 외우고 얼굴과 맞추어야 했다. 이름이 있어도 잊어버렸을 정도로 쓰질 않았다. 모든 걸 짐작하고 헤아려야 하는 두루뭉술의 시대였다.
그나마 금융실명제 이후로 90넘은 노인의 이름을 이제는 알 수 있게되었다. 이제 진정 시장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 ‘이모’ ‘형님’ 대신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클린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힐러리’ 하고 부를 수 있는 평등한 시장민주주의 사회가 우리에게도 와야 한다. 호칭문제로 왈가왈부하고 나이 문제로 티격태격해서는 갈 길이 멀다.
[2016년 11월 23일 제82호 27면]